`운수 좋은 날`을 읽고 운수좋은날

"운수 좋은 날"을 읽고
원래, 나는 책이랑 담을 쌓고 사는 사람이다. 몇 권을 읽어도 끝이 안 나는 긴 책. 이해가 안 돼서 읽고 나서도 찜찜한 책, 지루한 책, 읽는 동안 머리 복잡한 책. 딱 질색이다. 책을 읽어야 상식이 풍부해지고 무식쟁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책을 싫어하는 내 맘과 싸워 이기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요번 여름 방학에는 꼭 읽어봐야지` 했었던 "표본실의 청개구리"도 읽다보니 무슨 내용인지 복잡하게 꼬여서 읽다가 포기하는 바람에 방학엔 책을 열심히 읽어보겠다던 나와의 약속은 또 다시 전설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책을 싫어하는 나의 이런 마음들을 싹 바꿔놓은 책이 한 권 있다. 읽으면 읽을수록 슬픈 책, 처음으로 책을 쓰는 사람들을 존경하게 만든 책. 처음으로 나를 울린 책. 바로 현진건님이 쓰신 "운수 좋은 날"이었다.
처음엔 제목이 "운수 좋은 날" 이길래 요번 건 해피엔딩이겠…(생략)

른하였지만, 그는 제 입으로 부르고도 놀랄 만큼의 엄청난 액수를 부르고는 계속 정거장으로 달린다.
한꺼번에 이런 금액을 불러라도 본 지가 얼마만인가. 순간, 아픈 아내에 대한 염려는 사라지고 욕심이 김 첨지의 눈을 가린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상한 행운에 대한 겁도 조금씩 사라져 간다. 그는 손님을 더 태우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정거장 주위를 맴돌면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추근대 본다. 그러다가 인사동까지 태워다 주기로 한 손님을 내려주고 난 다음 그는 집의 광경이 눈앞에 자꾸만 어른거리어 이제는 마음이 초조해지기 시작한다. 내가 봐도 이제 더 이상의 행운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일 것 같았다. 그렇게 김첨지는 비틀거리면서도 황급히 집 쪽으로 향한다. 그는 오늘 기적 같은 벌이를 하였다는 기쁨을 될 수 있으면 오래도록 지니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까지 계속된 행운 뒤에는 무서운 불행이 이어질 거라는 것을. 곧 닥칠 불행을 향해 달려가면서 날 좀 구해 달라고 잡아 달라고 애원하듯 주변을 두리번두리번 거리던 김 첨지는 선술집에서 벌써 한 잔한 듯한 그의 친구 치삼이를 만난다. 치삼이와 그는 함께 선술집으로 들어간다. 김 첨지는 모처럼 돈 걱정 없이 술을 잔뜩 마신다. 술에 취한 김 첨지는 돈이 없을 테니 그만 마시라는 눈치를 보내오는 술 따르는 아이에게 돈을 내어 보여주면서 떵떵거리고, 머릿속에 자꾸 떠오르는 슬픔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들을 다 없애 버리려고 하는 듯 괜히 시끄럽게 웃고 떠든다.
그러더니 갑자기, 마누라가 죽었다고, 우리 마누라가 오늘 죽었다고 엉엉 소리내어 울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또 마누라가 죽지 않았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러니까 김 첨지는 아마 아내가 안 죽었을 거라는 것을 믿고 확신하려고 애쓰면서 불안한 맘을 떨쳐 버리려고 그랬을 것이다. 김 첨지는 취중에도 설렁탕을 사 가지고 집에 도착한다. 만약 그가 술에 취하지 않았다면, 대문에 들어간 순간의 무시무시한 정적에 다리가 떨렸으리라. 기침소리도 숨소리도 없는 집 대문에 들어서자마자 김 첨지는 소리친다. 이런 난장맞을 년이 남편이 들어오는데 나와 보지도 않는다고. 이 고함이야말로 밀려드는 끔찍한 불안감을 쫓아버리려는 노력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김 첨지는 방문을 왈칵 연다. 온갖 역한 냄새가 나는 방안에 들어선 그는 설렁탕을 한 쪽 구석에 내려놓을 새도 없이 누워 있는 병자에게 발길질을 하며 호통을 친다.
발로 차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아내. 김 첨지는 말없는 아내에게 달려들어 아내의 머리를 껴안고 흔들며 아내가 죽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하는 듯 계속 `왜 말이 없냐`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묻는다. 그러다가 아내의 뒤집힌 눈을 보면서 김 첨지는 목이 메어 눈물을 흘린다.
마지막에서, 김 첨지가 죽은 아내의 얼굴에 제 얼굴을 묻고 비벼대면서, "설렁탕을 사다 놓았는데 왜 먹지를 못하니? 왜 먹지를 못하니?... 괴상하게도 오늘은 운수가 좋더니만..." 했을 때, 나는 갑자기 기가 탁 막히고 소름이 쫙 끼치는 것을 느꼈다. 너무 무섭기도 했지만, 아내가 죽고, 앞으로 남을 김 첨지와 그의 아들이 너무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처음 읽을 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밤에 자려고 누워서 생각해 보니, 참 그렇게 기가 막히게 슬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옆에 누워있는 엄마한테 오늘 논술시간에 `운수좋은날`을 읽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슬프다는 둥 불쌍하다는 둥 주절주절 하면서 엄마를 껴안고 서럽게 울었다. 엄마는 내가 점점 인생을 알아 가는 것 같다고 하셨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사실, 지금까지 나는 나를 참 독한 애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가을동화"를 보고도 끄떡하지 않는 나를 우리 엄마는 신기하다고 하셨다. 어떻게 저런 걸 보고 안 울 수가 있냐고. 그래도 눈물이 안 나는 걸 날더러 어쩌라고. 사람들 다 운다고 해서 별로 슬프지도 않은 나까지 눈물을 짜낼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 이래서 나도 내가 꽤 독하고 못된 앤 줄 알았더니, 이제 보니 내 감정도 아직 죽지 않은 것 같아 매우 매우 뿌듯하다. 김 첨지는 아마 아내 없이 혼자서 아들을 데리고 살아가는 동안. 아내가 자기가 부린 욕심 때문에 죽은 거라고 생각하며 혼자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살게 될 것 같다. 그러게 진작에 마음을 비워야 했다. 이상할 만큼 지나친 행운 뒤에 올 불행을 조금 더 일찍 깨달았어야 했다. 욕심을 못 이긴건 진짜 밉지만, 또 한편으론 너무 안됐기도 하고 가슴이 싸~아 하기도 하고. 난, 불타는 열정적인 사랑만이 사랑인 줄 알았다. 서로를 불쌍해 한다는 것, 너무 불쌍해서 가슴이 아픈 부부간의 묵은 사랑. 콧날이 시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