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부를 읽고 두부

두부
이 책은 박완서님의 어릴 적 추억하기와 더불어 이사온 아치울에서 겪은 소소한 일상을 이야기한 수필집이다. 누구나 어릴 적 아련한 추억거리를 곱씹으며 웃거나 아쉬워하거나 울어본 적 있을 것이다. 익숙한 것들로부터의 멀어짐은 가끔 추억하기를 통해 그 허전함을 메꾸곤 한다. 특히나 현대는 각박한 그리고 잡을 수 없이 급속한 변화를 더욱 가속화하는데 반면에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몸과 마음에 잦은 브레이크가 걸리고 흐름은 더디어간다. 그럴수록 아련하게 다가오는 것이 추억이며 그 중에서도 특히나 나와 같이 자라고 피어나던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장 가슴에 와닿지 않나 싶다.
가족은 가끔 타인과의 맞대결중인 일에 내 가족에게 전폭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낸다. 설사 잘잘못을 가리는 현장에서도 내 가족이 잘못된 생각을 피력하고 있다 해도 일단은 내 가족에게 힘을 실어주는 것이 사실이다. 가족이란 댓가 없이 한없…(생략)

뛰어 놀던 개성의 산과 들이 그리워지고, 아담한 뜰에 핀 채송화, 봉숭아 같은 소소한 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한다. 서울 토박이인 남편이 이해할 수 없는 시골에 대한 향수 덕분에 아치울에 자신의 마음 둘곳을 짓고 노년의 여유를 누리면 산다.
일제하에서 보낸 어린시절, 사춘기적 감수성으로 겪은 6.25 를 겪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이 겪어보지 못한 유년시절의 회고는 부모님의 인생을 보는 것 같았다. 유복하지 못한 생존의 사투를 겪은 유년시절을 보내고, 경제개발의 주역으로 이 시대의 경제 기반을 쌓아온 우리들의 부모님을 우리는 과연 홀대하고 있지는 않는지 되돌아 보게 한다. 또 한가지 노년에 얻게 되는 병 두 세가지쯤 가지고 있다는 말에 가슴 찡했다. 평생 힘들게 경제를 살리고, 자녀들을 키우는데 온 기력을 다한 후 쇠약해진 몸 속에 잔뜩 서린 병마들이 숨 돌릴 틈 주지 않음에 야속하기도 했다. 이런 우리들의 부모님께 감사에 마음과 노년을 편하고 자유롭게 해드리고자 좀더 노력해야 겠다는 생각이다.
작가의 아치울 사랑이 아기자기 하다. 주간지에 연재 됐던 글들이라고 하는데 자연이 묻어난 자연과 동화되는 주인공의 모습이 참 좋다. 자연냄새가 베어나는 듯하다. 그중 약간은 서글픔도 있다. 아치울통신이란 연재물을 공동 작업하던 화가 손혜경의 추억이다. 함께 아치산에 오르기도 하고, 봄나무를 캐기도 하던 그 화가 손혜경이 투병중 젊은 나이에 요절한 것이다. 나이 차이는 컸어도 동무였던 화가의 죽음에 허전함과 미래에 다가올 죽음에 대한 예비로 가슴이 시렸을것 같다. 누구에게나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은 지켜보는 가슴 절절함으로 남아 있듯이 말이다.
사람들이 가지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은 노년에 들어서면서 극대화 되는 것 같다. 가끔 TV에서 임진각 전망대에서 갈 수 없는 고향을 향해 망원경에 동전을 넣어 그리움을 달래는걸 볼 수 있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에 있어서 최고령위주로 대상자를 선발하겠다는 적십자의 발표도 통일을 볼 수 없을 것 같은 노년에 대한 위안이 답겨있지는 않을까하고 생각해본다. 작가의 고향은 개성이다. 작가는 그나마 행운인게 문인단체가 주선하는 방북 기회를 통해 개성을 찾아가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린시절 느낀 고향의 향수는 찾아 볼 수 없었고, 기억속에 고향을 더 간직하고 싶었한다. 고향은 우리들의 기억속에 남아 있기 때문에 고향인 것 같다.
두부는 콩으로부터 풀려난 상태이나 다시는 콩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뜻하기에 우리 사회는 경찰서 유치장만 다녀와도 두부를 먹는 관습이 있다. 다시는 그곳에 돌아가지 말라는 뜻으로 말이다. 하지만 요즘 우리시대의 정치인들은 두부의 숨은 의미를 모르는 것인지, 모른체 하는 것인지 수감 생활을 마치고 나올때는 열심히 두부를 먹다가도 그 사건이 잊혀지기도 전에 반복하곤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정권이 교체될 때마다 반복된다.
얼마전 청문회에서 전직 대통령이 자신의 재산은 29만원이 전부라고 해서 항간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국민은 이런 일들의 반복으로 정치권을 신뢰 하지 않게 되었다. 정치권 뿐만이 아닌 우리 모두는 진정한 두부가 가진 속뜻을 헤아릴 줄 알고, 반복하는 우를 범하는 어리석은 자들의 대열에 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23편의 각기 다른 글들에는 작가의 노련함이 묻어나며,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 가끔 한번씩 꺼내어 읽어 볼 만한 책인 것 같다. 스치고 지나던 자연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었고, 그런 작은 일들속에서 찾는 감동은 더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게 된다.
산문집, 그것도 박완서님같은 대작가의 책이라면 연륜에서 나오는 삶의 통찰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책을 산 목적은 그런 것이었지만, 칠순이 된 그분의 관심은 주로 자연이나 식물 쪽에 머무는 듯하다. 화분에 물주는 걸 이불개는 것 다음으로 싫어하는지라 분꽃이 어떻고, 채송화가 어떠며, 돌나물이 어떤가에 관한 얘기가 주를 이루는 이 책을 난 다소 심드렁하게 읽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식물을 통해 삶을 관조해 보는 것도 전혀 의미없는 건 아닐 테지만, 애당초 내가 가졌던 기대가 조금 어긋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책의 말미에 있는 <내 안의 언어사대주의 엿보기> 이후의 글들은 재미도 쏠쏠할 뿐더러 내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준다. 책 전편에 걸친 박완서님의 유려한 문체를 부러워 해보지만, 그런 재주는 내가 평생을 노력해도 가질 수 없는 것임을 알기에, 책을 통해서나마 박완서님의 글을 읽을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