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를 읽고 상실의시대

‘상실의 시대’를 읽고
이 책은 특별하다. 이 책을 접하게 된 것부터 나의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필연적인 것이었다. 독후감 제출 날짜는 다가오는데, 휴일이라 도서관은 닫혀 있었고, 할 수 없이 룸메이트가 가지고 있던 이 책을 부득이하게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만약 나에게 선택의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이런 고리타분한, 약간은 사회학 관련 도서처럼 느껴지는 제목을 가진, 게다가 무려 500페이지를 넘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 따위는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남은 기간은 3일인데, 과연 이 무거워 보이는 소설을 다 읽고 제 기간 내에 독후감을 제출할 수 있을지 걱정부터 생겼다.
첫 장면에서는 잠깐 연애 장면이 ― 정확히 말하면 주인공이 연애 장면을 회상하는 장면이 ― 등장하더니, 그 다음부터는 역시 제목에서 느꼈던 사회학적 분위기가 강했다. 무슨 기숙사가 수상한 분위기가 감돈다느니,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는 단어…(생략)

또한 이 책의 매력인 것이다.
이러한 이 책의 매력을 서서히 깨닫게 되어갈 때쯤에서야 나는 발견하고 말았다. 책 표지에 써 있는 커다란 ‘상실의 시대’라는 제목 아래에 자그마한 크기로 쓰여져 있는 원제를 말이다. 노르웨이의 숲 ― 이 얼마나 단촐하면서도 상쾌한, 그리고 이 책의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제목인가! 그런데도 굳이 제목을 이런 부담스러운 이름으로 바꿀 필요가 있었을까? 원제에 어느 정도 담겨 있는 작가의 여러 가지 의도를 무시하면서까지 말이다.
이 책에서는 비틀즈의 노래 ‘노르웨이의 숲’이 마치 영화의 배경음악과도 같이 사용되고 있다. 비단 노르웨이의 숲 뿐만 아니라 미틀즈의 여러 가지 노래들, 그리고 비틀즈 뿐만 아니라 당시 젊은 세대가 열광했던 여러 가지 팝송들이 이렇게 소설의 배경을 담당해주고 있다. 그 중에서 작가가 ‘노르웨이의 숲’을 제목으로 선택했던 데에는 작가 나름대로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노래의 가사가 책의 시작에 인용되어 있지 않은가! 이것은 어쩌면 소설의 전체적 분위기와 주제를 암시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이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은 소설에 있어서 중심적인, 그리고 핵심적인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원제에 작가의 의도가 숨겨져 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밀어낸 새로운 제목 ‘상실의 시대’는 그럼 어떠한 뜻을 담고 있는 것인가?
우선 ‘상실’이라는 단어로부터 소설의 내용을 여러 가지로 분석해보면, 주인공 와타나베가 겪은 친구들의 죽음, 그리고 자신이 어디있는지를 잊어버리는 소설 마지막 장면 정도가 ‘상실’이라는 단어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겠다. 주인공이 친구들의 갑작스런 죽음을 겪음으로써, 그는 자신과 아주 밀접했던 주변 인물들을 하나하나 상실해감을 느낀다. 또한 그 원치 않던 상실로 인해,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그는 결국 자신의 존재조차도 상실하고 만다.
그렇다면 ‘상실의 시대’라는 것은, 비단 이 주인공 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이러한 상실이 보편화되었음을 호소하는 제목이라고 볼 수 있겠다. 아닌게 아니라, 실제로 우리 사회에서 이런한 상실을 찾아보기란 어렵지 않다. 꼭 ‘죽음’이라는 거창한 단계를 거치지 않더라도, 어제까지만 해도 서로 마음을 나누던 사람이 오늘은 바로 등을 돌려버리는 경우가 얼마나 허다한가? 또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상실한 채 의미없이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러한 점에서 이 제목을 지어낸 누군가는, 이 책이 이러한 ‘상실의 시대’에 뭔가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책의 뒤편에 추가되어 있는, 소설에 대한 평론은 대체적으로 이 소설이 100%의 연애 소설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또한 이것이 대부분의 평론가들의 반응이라고 한다. 그럼에도 나는 이 소설을 단순한 연애 소설로 받아들이기엔 뭔가 찝찝한 기분이다. 그저 순수하고 솔직한, 아름답고 애절한 연애를 그리고 싶었다면, 굳이 소설 중간중간에 파격적인 장면들을 묘사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장면이 소설에 등장했다는 자체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작가가 그러한 장치들을 소설에 사용하였다면 그것은 그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즉, 작가가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이 소설은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라는 주제 이외에도 ‘한 시대를 감싸고 있는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진실로 사랑한다는 것은 자아의 무게에 맞서는 것인 동시에, 외부 사회의 무게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 이것이야말로 이 소설을 읽는 내내 내가 받은 느낌이었고, 이러한 주장을 담고 있는 이 소설은 100% 연애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인간=사회 관계에 관한 고찰을 담고 있는 소설이라고 하는 편이 좋을 듯 싶다. 실제로 이 소설의 등장 인물들이 품고 있는 독특함은, 사회와의 독특한 관계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이 소설을 순수한 연애 소설이라고 한다면, 거기에도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사회 관계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기는 하지만, 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고요하고 잔잔한 와타나베와 나오코와의 애정, 그리고 이에 대응하는,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미도리와의 애정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만큼 이 소설은 순수한 사랑을 그려내고 있으며, 그와 동시에 사회적인 고찰도 곁들였으므로, 그야말로 성공적인 소설이 된 것이다.
소설을 워낙 급하게 읽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제대로 정리가 안된 상태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 취향에 맞는 소설임은 확실하다. 지금 시간에 쫓겨 정리가 안된 나의 생각들을 두서없이 글에 쏟아냈기는 했지만, 다음에 시간적 여유가 생긴다면, 그때는 다시 한 번 차분이 소설을 음미하고 싶다. 어쩌면 그 때는 지금의 나의 감상과는 또다른 의견이 나의 생각으로 자리잡을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