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를 읽고 상실의시대1고

[상실의 시대]
상실의 시대는 내게 있어 참 안 읽히는 책 가운데 하나였다. 이사할 때마다 늘 짐이 되곤 했었는데 밀린 숙제를 하듯 이번에 읽고 말았다. 두어 번 읽기를 시도했던 기억이 있었는데 한 번은 우물 이야기를 하는 장면이었고 한 번은 항공모함을 생각하며 수음을 하는 룸메이트 이야기를 하는 대목까지 읽다가 그만 두었다. 이 두 가지 에피소드는 이번에 책을 완전히 읽은 이후에도 가장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중년의 남자가 18년 전, 고교생 시절을 회상하는 내용의 이 작품은 샐린저의 [호밀밭의파수꾼]과 굉장히 흡사하다. 작중에 호밀밭의 파수꾼 얘기가 두 번이나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작가는 어떤 식으로든 영감을 받은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호밀밭의 파수꾼이 성장 과정의 한 소년의 눈에 비친 허위와 가식으로 가득 찬 어른들의 생애를 조명하고 있다면 하루키 소설은 고등생소년의 눈에 비친 성장 과정의 성(性)적…(생략)

죽음 모티브이다. 죽음에 대한 성찰은 섹스 이야기의 가벼움을 넘어서고 있을 정도로 진지하다. 이 소설 속에는 많은 죽음이 등장한다. 나오코의 애인이자 와타나베의 친구인 기즈키는 차고에서 자살한다. 친구 기즈키의 죽음은 늘 와타나베를 따라다닌다. 평생 병치레를 하며 죽어가는 이력이 있는 미도리 가족들의 죽음이 있고 말미에 나오코의 죽음이 배치된다. 죽음은 시대의 종말을 암시하는 동시에 죽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은 영원성의 획득이다. 즉,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삶과 사랑은 죽음이라는 과정을 통해 영원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죽음이란 한참 희망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할 나이 열여덟 열아홉이 감당하기엔, 혹은 성찰하기엔 버거운 주제들이다. 그만큼 이 시대의 일본 사회상에 암울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뿐이다. 우리의 80년대를 생각해 보면 죽음은 낯설지 않은 단어이기도 하다.
또 하나,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 와따나베의 섹스에 대한 성찰은 30, 40대를 살고 있었던 작가의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열여덟 열아홉 살 소년이 치루어내는 섹스와는 전혀 동떨어진다. 삼 사십대의 중후한 대사와 생각으로 섹스나 성에 대한 관찰이 묘사돼 있어 실제 주인공 시점과는 상당한 괴리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