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시대 상실의시대

무라카미 하루키, 《상실의 시대》, (문학사상사, 1988)
--- 책을 읽기 전 ---
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책을 구하러 집 근처 책방으로 갔다. 책방에는 뭘 읽을지 고민할 필요도 없게 세 권 중 ‘상실의 시대’만 있었다. 광고의 영향인 것 같았다. 꽤 많은 사람들이 빌렸었는지 책을 싼 투명 표지가 미끈거려 좀 불쾌했지만 어쩔 수 없이 빌려왔다. 책 날개에 있는 줄거리를 대충 읽고 나니 ‘숱한 삼각관계가 퍼즐처럼 짜여진 연애소설’이라는 대목에 3류 소설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권장도서이니 좀 다르겠지 하고 읽기 시작했다.
--- 서문 ---
처음 읽어가면서 별 느낌도 생각도 없었다. 보고서를 작성하면서 다시 한 번 들여다보니 ‘사람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의 의미’를 그려내고 싶었다는데 내가 글을 읽으면서 별반 느낌을 받지 못한 것은 작가의 잘못인가, 나의 잘못인가? 굳이 따지자면 내 잘못이겠지만 먼…(생략)

것이고, 그 느낌은 왜곡할 수 없을 테니 말이다.
--- 2장 ---
기숙사 생활에서 지극히 개인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일이, 불쾌감을 주는 일도 포함해서, 아주 큰 결례인 일본인의 특징일지도 모르겠지만, 서로 얘기하면서 이해하지 못해도 이해시키려 하거나 이해하려 노력하는 모습이 없다. 그저 그렇다며 대화가 끝이 난다.
이 장에서는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기억나는 두 가지 구절 중 하나가 등장했다.
‘죽음은 삶의 반대편 극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일부로서 존재하고 있다.’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하루 더 죽음에 가까워짐을 생각하면 저 말에도 공감이 간다, 아니 이해가 간다. 내가 아직 절실하게 느낀 적은 없으니까, 머리 속으로만 이해하고 있다.
--- 3장 ---
나는 처음에 나오코가 ‘나’를 통해서 기즈키를 회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구절에 가서는 거의 확신했다. 하지만 뒤의 해설인가를 보니 기즈키를 포함한 삼각관계를 얘기하고 있었다. 기즈키가 살아있을 상황에서는 삼각관계라고 보기 어려워 죽은 기즈키를 끼워 넣으니 그것도 말이 된다 생각했다. 내 생각과 해설이 뭔가 비슷한 면도 있어 보이기는 하지만 나는 이 부분에서 국한된 생각으로 나중에는 기즈키를 생각지도 않았다.
그리고 이 부분에서 많은 작가들이 나열되는데 역시나 나는 어느 하나 아는 사람이 없었다. 대학가면 조금은 교양인이 되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오코의 생일날, ‘나’가 나오코와 잔 일이 옳았는지 아닌지는 나도 역시 잘 모르겠다. 그날 밤 나오코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울었던 것이고, 또 ‘나’의 질문엔 왜 그렇게 울었을까......
아무튼 이 책은 사랑이 어쨌느니...하지 않아서 좋았다.
--- 4장 ---
이 장부터는 주인공인 ‘나’가 정말 혼자인 시간이 많아졌다. 주위의 모든 일들도 ‘나’의 시각에서 지극히 주관적으로 보였다. 물론 앞의 시점도 ‘나’의 주관적인 시점이었지만 여기부터는 ‘나’의 감정이 격하게 나타났고, 그 안에서 미도리는 상반된 이미지로 등장했다. 무료함에 지쳐가고 있던 ‘나’에게 생명감을 분출하는 미도리가 말이다. 나와 같은 사람은 미도리와 같은 성격의 사람이 참 부럽다. 무미건조하고 답답한 나로서는 억지로 그런 척 해볼수록 어려운 일이다.
점점 생각 없이 읽어가던 중에 일본이 우리 나라와 정말 많이 다르다고만 생각하고 이 장이 끝나버렸다.
--- 5,6장 ---
나오코가 숨겨왔던 이야기들이 나오지만 결코 놀랍지도, 충격적이지도 않았다. 직접 듣는 것은 아니지만 나오코의 어조가 무척 차분하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오코는 언니나 기즈키의 죽음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역시나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사람들에게 많은 충격을 준다. 나는 아직 겪어 보지 못했지만 상상만으로도 힘들다.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점점 더 두려워지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나오코가 지내는 요양원은 나도 힘들 때면 도망가고 싶은 공간이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그런 장면이 떠오르는데 그래서 내가 정신과 의사가 되기를 동경하는 것일 수도 있다. 좀 말이 안되긴 하지만 ‘자기가 받고 싶은 물건을 선물로 다른 사람에게 준다’는 그런 생각인지도 모른다.
--- 7장 ---
‘나’는 미도리의 아버지를 만난다. 별 생각은 없었는데, 나도 오이에다가 김을 감아 간장에 찍어먹어 봐야겠다. 정말 맛있을까?
그리고 ‘내’가 얘기한 ‘간단하고, 신선하고, 생명의 내음이 물씬 나는군요. 좋은 오인데요.’라는 문장은 내게 봄의 새로 난 연한 잎사귀를 떠올리게 했다. 죽음을 앞두고 있는 미도리의 아버지와 ‘아작아작하고 나는 오이의 상쾌한 소리’ 대비되면서도 소리가 아버지에게 생명을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금방 돌아가시게 되어 아쉬웠지만.
--- 8장 ---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이다. ‘나’와 나가사와 선배의 대화가 있는 장. 노력과 노동이 다르다는 나가사와의 말에 처음에는 불쾌했다. 별로 기억에 남을 거 같지도 않았는데 이 부분을 읽은 날 밤 잠이 잘 오지 않아서 책 생각을 하다가 갑자기 이 말이 머릿속에 떠올랐고, 또 한 친구가 떠올랐다. 항상 긍정적인데다가 진취적이고 적극적이고 노력하는, 나와는 많이 다른 친구여서 부러워하기도, 시기하기도 했는데 나랑 그 친구의 차이가 노동과 노력의 차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 9,10장 ---
나오코와 미도리 사이에서 ‘나’는 갈등하게 된다. 미도리와 연락을 끊고 지내면서 ‘나’는 미도리에 대한 감정을 알아 가는 것 같다. 그런데 책 날개에 있던 줄거리 중에서 ‘마치 필연적인 운명인 듯, 삼각관계를 맺지 않고서는 배겨내지 못하는 방향으로 스토리가 전개’된다고 되어 있었는데 내용을 봐서는 그리 필연적인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마지막의 삼각관계는 어이없이 깨져버리기 때문이다.
--- 11장 ---
나오코가 자살을 했다. 이 책엔 왜 그렇게 자살하는 사람이 많은 지 모르겠고, 나오코도 유서도 남기지 않고 자살했기 때문에 왜 죽어야 했는지 모르겠다.

책을 읽기 시작하면 끝까지 보는 습관이 있어서 다시 뒤적거리며 이 보고서를 쓰자니 힘들고 아쉽다. 읽어가면서 생각을 써놓았으면 그리 대단한 것은 아니어도 그나마 많이 쓸 수 있었을 텐데, 이렇게 써놓고 보니 정말 내가 생각이 없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책을 읽게되면 언제나 하는 생각이 있다. 우리는 그 책을 쓴 사람이 의도한 바를 깨달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읽는 사람이 느끼고 받아들이고 싶은 그대로 느끼고 받아들이면 되는 것인지, 어느 쪽이 책을 읽는 자세로 올바른 것이지 늘 궁금하다. 나는 후자가 더 맞는 얘기라고 생각하며, 의도한 바가 있어도 작가의 능력이 부족하여 독자가 깨달을 수 없다면 독자에게는 굳이 애쓸 필요가 없다고, 전자를 주장하는 사람에게 얘기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내가 부족해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변명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