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

상실의 시대
일본으로 여행을 가기 전날 밤, 책을 한 권 들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4박 5일 동안 읽을 수 있는 두툼한 책 한 권을 챙겼다. 지난여름 바다에 놀러가 파도 소리를 들으며 독서를 하는 것이 꽤나 매력적으로 느껴졌었던 것을 떠올리고 흐뭇한 마음으로 책을 넣었다. 어쩌면 친구들과의 여행에서 조금 튀어 보이고 싶다는 유치한 발상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일본행 비행기에 오르자 책을 꺼내들고 한 장 한 장 읽기 시작했다. 솔직히 만만치 않은 분량에 부담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페이지 수를 더해 갈수록 스펀지가 물에 흡수되듯 나 자신도 책 속에 자연스레 흡수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비행기의 미세한 진동 따위는 잊어버린 지 이미 오래였다. 이렇듯 `상실의 시대`는 4박 5일간의 일본 여행보다 재미있었던 책이다.
이야기는 보잉 747 비행기에서 우연히 비틀즈의 `노르웨이의 숲`을 듣게된 내가 18년…(생략)

인상깊게 읽었던 부분은 나오코의 소식을 알려준 편지이다. `이곳에 있는 한 우리들은 타인을 괴롭히지 않아도 되며, 타인으로부터 괴롭힘을 당하지 않아도 되지요.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가, 자신이 `비뚤어져 있다` 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점이 바깥 세계와 전혀 다른 점입니다. 바깥 세상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비뚤어짐을 의식하지 않고 살고 있거든요. 하지만 우리들의 이 작은 세계에서는 비뚤어짐이야말로 전제 조건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인디언이 머리에다 그 부족을 나타내는 깃털을 꽂고 있듯이 비뚤어짐을 몸에 달고 있지요. 그리고 서로가 다치지 않도록 조용히 살고 있는 것입니다.` 나오코의 말처럼 우리는 어쩌면 모두 비뚤어진 세상에서 비뚤어진 채로 살아가는 지 모른다. 모두 거짓말을 둘러대면서 가식이라는 틀 안에서 웅크리고, 자신을 드러내 보이기 싫어하는 비뚤어짐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의식을 못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모두 읽고 나서도 한 구절, 한 구절이 너무 예쁘고, 감동적이어서 어딘가 써 놓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중간의 어느 페이지든 아무 데나 펼쳐 읽어도 좋다. 다시 말하면, 이 책에서 좋은 구절을 찾아내는 일은 너무나 쉽고 간단하다. 하지만 전혀 쉽게 식상해지지 않고, 오히려 바닷가에서 예쁜 조개껍질을 찾아내는 일만큼이나 즐겁게 느껴진다.
내가 고등학교로 가는 문턱 앞에서 읽은 `상실의 시대`는 단순한 연애소설보다는 내 인생에 대해, 삶에 대해, 죽음에 대해, 그리고 미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일종의 안내서였다. `상실의 시대`가 10년이 넘도록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온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에 다시 한 번 읽어 봐야겠다. 이번엔 연필을 하나 들고 줄을 치면서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