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된 농담 아주 오래된 농담

아주 오래된 농담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박완서의 소설은 우리 사회의 양면성의 모순을 예리하게 지적하고 있다. 대략적으로 말하자면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나목>에서는 6?25전쟁과 근대화로 한국 사회의 소시민들의 삶의 애환, <그 여자네 집>에서는 일제시대 강제 징용으로 인한 순수한 사랑의 상실과 분단으로 인한 민족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이번에 읽었던 <아주 오래된 농담>은 황금만능주의의 발단이 되는 돈의 물신성이나 가부장적 이념의 부조리함을 비판하고 있다.
이야기는 크게 두개로 나눠지는데, 그 중 하나는 돈의 물신성을 대변하는 송씨 가문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거대재벌인 Y건설업의 장남 송경호가 암으로 죽음을 맞게되는데, 그의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그것조차도 돈과 돈을 둘러싼 가족간의 암투에 휩싸여 있어, 정작 본인은 자신이 왜 죽었는지도 모르게 된다(솔직히 말하자면 송경호는 아직 죽지 않았…(생략)

불임임을 알게 된다.
이 소설에서 가장 첨예한 대립을 이루는 인물은 현금과 수경이다. 현금은 자본의 지배하에 있지 않고 가부장적 제도 밖에서 떠도는 유일한 인물이다. 이혼 하기 전에는 물론 그녀도 돈의 노예였던 적도 있었지만 이혼 후의 그녀의 삶은 모든 이념이나 제도로부터 벗어나 있는 일탈된 시공간에 놓여 있다. 그녀는 영빈에게 순수했던 시절을 불러일으키는 센티멘탈한 대상이자 안식처이기도 한다. 일탈과 순종의 경계와 문명과 야수의 본성 사이에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녀를 대변해주는 사물인 능소화의 난만함은 어떤 제도나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는 야성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녀의 불임은 환상은 환상일 뿐, 결국 현실에서의 질서의 이중성 안에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그녀는 다시 현실로 돌아오게 되고 그녀의 욕망 또한 불가능하게 된다.
그와 대비되는 영빈의 아내 수경은 두 딸을 두고도 불혹의 나이에 아이를 임신한다. 그녀의 임신의 목적은 아들을 낳기 위한 것이었고, 아들을 낳은 후 그녀는 `당당한 아내의 자리`를 과시한다. 그러한 수경의 행동에 겉으로는 감동을 느낀 영빈의 마음은 어땠을까? 아마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와 상업주의가 결합된 탄생에 대한 강한 비난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결국 수경의 아들의 임신은 어머니로서의 지위는 아들이란 존재로 인해 확보된다는 수경의 굳은 믿은이 생명에 대한 고귀함도 무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욕망은 살아 있지만 몸이 쇠퇴한 현금의 불임과, 몸은 살아 있지만 정신이 먼저 쇠퇴한 수경의 출산은 그야말로 작가가 서술한 `개와 늑대의 시간`의 양쪽을 의미하는 것 같다. 현대 문명의 가능성은 철저히 제도로 막혀 있는 삶이나 완전한 일탈 어느 쪽에도 존재 하지 않다는 것이다. 현금의 욕망이나 생뚱스러움은 제도가 완전히 그 밑으로 복종시키지 못한 우리의 낯선 시간속의 우리 문명의 가능성의 존재감을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이 작품은 탄생이나 죽음 그 어느쪽에도 그 가치가 치우처져 있는 것이아니고 그 둘에대한 악몽이다. 우리의 탄생이나 죽음을 황폐하게 만드는 현실 속에서 "난 죽고 싶어"라고 말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이 아직까지도 존재한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자본주의 질서나 가부장적 이념에 대한 비판과는 다른 시작에서 이 작품의 의미를 발견하고 볼 수 있게 해준 능소화를 한번 만발한 때에 보러 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