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정이현의 “낭만적 사랑과 사회”를 읽고
작년부터였나. 문지에서 신인문학상을 수상하고 데뷔했다는 작가가 거듭 문학상 두 개를 거머쥐었다. 굳이 찾아읽지 않아도 읽어보렴,하고 채근하듯 불거지는 이름이었다. 게다가 데뷔작인 이 책에 대한 입소문도 좋았다. 정이현이었다. 상복많은 작가겠거니 해도 연달아 운이 따르면 그마저도 모종의 필연이 아닐 수 없다. 굳이 찾아 읽어보니 상찬이 과할 수록 실속이 없다는 의구심은 거두고도 남을만한 작가란 생각이 들었다. 때늦은 발견이었다.
연애와 결혼을 둘러싼 세태를 둘러보면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는 희비극이 연출되곤 한다. 조금쯤 거리를 두고 그 세태를 바라보면 어떤 익살맞은 실소와, 두드러기같은 조소와, 시큼한 냉소 따위의 소(笑)가 지어진다. 사랑에 목숨 걸만큼 시대착오적인 연애담은 판타지일 뿐이고, 사랑하니까 결혼하는 건 미친 짓이라는 것 쯤은 머리 굴릴 수 있…(생략)

사수하기 위해 불철주야 내숭연마에 공을 들이는 주인공 만큼이나, `한 번 하자`라는 말대신 `사랑해`라고 눙을 치는 남자들의 위장술도 조소의 대상이다. 이처럼 짝짓기를 둘러싼 권력관계는 암컷, 수컷이 공모하여 벌이는 위장술의 힘겨루기와 다를바 없다고, 정이현은 꼬집어 세태를 말한다. 그런데 정말 야물딱지게도 꼬집는다.
얼마나 야물딱진가 하면, 꼬집어놓고는 시치미를 뚝 떼는 능청이다. `너두 알잖아` 라고 눈짓 한 번 찡긋하는 너스레다. 이쯤되면 나도 모르게 뜨끔하다. 뭐지? 떨떠름 찝찝해지는 나는 뭐야. 말하자면 정이현의 위장술에 걸려든 셈이랄까. 그의 글에는 세태에 비분강개하는 도덕적 낭만주의자들을 움찔하게 만드는 도발의 비웃음이 숨겨져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세태도 우습지만 `낭만적 사랑의 사회`가 쳐놓은 그물코에 걸린 양, 군들의 순진무구도 웃기기는 매일반이군. 하는 비웃음. 그 비웃음이 뜨끔한 건 내가 조금 덜 순진한 후자의 그 김양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사랑하니까` 팬티를 사수하거나 헌사하는 것처럼, `사랑해`라고 눙을 치면 한 번 자줄 거라고 믿는 많은 양, 군들처럼 나 김양의 고매한 낭만주의도 별 수 없이 이 세태에 깊숙이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그러니 나는 좀 달라,라고 차별지어도 결국 나의 낭만주의도 기만적인 `위장술`에 불과할지 모른다. 그 위장술을 까발리는 비웃음에 제법 날이 서 있다. 살짝 스치는 도발 같았는데 따끔하다 못해 뜨끔했다. `다 알면서 아닌 척은` 비웃음을 숨긴 그의 너스레에 자조의 웃음이라도 지어줘야 할 거 같은.
표제작 뿐만 아니라 수록된 단편들 대개가 일관되게 복잡미묘한 소를 유발한다. 작품마다 세상 물정에 빠삭한 그녀들이 등장한다. 그녀들은 세상을 너무 `잘`안다. 정교하고도 완고한 매뉴얼의 세계 말이다. 그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그녀들의 위장술은 영악하다 못해 탁월해 보인다. 비웃음을 사기 전에 세상을 비웃을 줄 아는 그녀들의 처세는 그래서 한편으로 근사하기까지 하다. 그것은 비웃음을 살만한 통속극을 통해 세태를 비웃음거리로 만드는 정이현의 영악한 위장술 덕택이기도 하다. 정이현은 근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