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귀고리소녀를 읽고 진주 귀고리소녀

진주 귀고리소녀를 읽고...
고백하건데, 나는 현대 미술, 특히 추상화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게 의미를 가지고 다가오는 그림은 구체적인 것, 즉 풍경이나 인물을 그린 것들이고 그 중에서도 사실적인 화풍으로 그려진 인물화들이 항상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그러다보니 미술관에서도 항상 발길을 멈추는 것은 초상화 앞이다. 대부분의 경우 초상화의 주인공들은 이름이 알려진 왕후대작들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 호기심은 배가된다. 도대체 그는(혹은 그녀는) 누구이며, 화가와 어떤 관계였길래 저런 식으로 화폭에 담겼던 것일까를 생각하고 상상하는 것은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다.
트레이시 슈발리에가 이 책을 쓰게 만든 동기 역시 그런 호기심이었다. 열 아홉에 이 ‘진주 귀고리 소녀’를 처음 보고 매료된 이후 ‘이십년 동안 어디에 살건 벽 한구석을 차지한’ 이 그림의 포스터를 보면서 작가는 점점 그림의 모델과 화가 베르메르 …(생략)

베르메르와 그리트 사이에 있었던 것은 어찌 보면 그리트 혼자 미루어 짐작한 미묘한 감정의 교류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미묘함 때문에 오히려 이 소설은 더욱 은은하게 빛난다. 개인적으로는 이 책이 러브스토리보다 오히려 일종의 성장소설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베르메르와 그리트 사이의 러브스토리 말고도 이 책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은 여러가지다. 17세기 델프트의 생생한 거리 풍경(도자기로 유명한 델프트이니만큼 그리트의 아버지를 타일 도장공으로 설정한 것도 꽤나 어울린다), 도장공으로 중산층의 아래 계급을 차지하다가 실직으로 몰락해 하층 계급이 된 그리트네 집안과 미술 거래상으로 길드의 대표를 지내기도 한 베르메르 집안 간의 차이와 그로 인한 계급의식, 오늘날과는 달리 철저하게 주문제로 그려지는 당시의 그림 생산 체제와 그로 인한 화가와 후원자, 모델간의 일반적인 관계 등을 이 책은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각적이라기 보단 텍스트적인 인간이라, 그림 그 자체보다는 항상 그 뒤에 숨어있는 이야기에 매료되곤 하는 내게 이 책은 아주 매력적이었다. 비록 그 대부분이 상상에 의존한 것이라 해도, 이 책 덕분에 베르메르의 그림을 볼 때마다 그 하나하나에 담겨있는 이야기를 주목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야기 전개에 필수적인 베르메르의 그림들을 상당히 깔끔하고 충실하게 실어준 편집 역시 칭찬해 주고 싶다. 책표지 역시 고급스럽게 디자인되어 집어드는 사람을 기분좋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