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불을 읽고 혼불2대

<혼불>
그곳엔 우물이 하나 있었다. 한 대여섯 명의 처자들이 둘레를 따라 서 있으면 둥그렇게 꽉 찰 만큼의 작은 우물이. 거기, 낮에는 하얗게 부신 햇살을 머금어 아룽대다가 한밤에 다시 달빛을 받아 검게 빛나는, 찰방진 우물물이 깊이를 모르게 반짝였다. 그 부신 햇빛 달빛을 모조리 되비칠 수 있는 심연의 영롱함. 나는 그 둥그런 명경에 자주 얼굴을 들이댔다. 저 아래 뿌리에서 수면까지 깊은 숨소리를 뿜으며 검게 맑은 얼굴로 눈 꿈벅이는 우물, 거기 비친 내 얼굴은 사념까지 한 점 거짓없이 죄다 드러나 바람이 불 때마다 우물에 얼비치었다. 꼬막같이 작은 얼굴을 하고 있던 유년의 풍경이다.
최명희 선생의 역작 <혼불>을 읽으면서, 나는 다시 그 옛날의 우물이 떠올랐다. 옛적의 풍경처럼, 엄마에게 혼이 나 떼를 쓰며 울다가 저벅저벅 걸어가 울음 번진 얼굴을 비추어보던 그 검게 깊은 우물, 이미 오래 전 방치되어버린 그 작은…(생략)

편협한 의식의 일단을 여지없이 드러나게 해준 것은 역시 <혼불>의 미세하며 날카로운 붓끝에서였다. 나는, <혼불>이라는 우물에 가까이 다가가 비로소 내 얼굴을 응시하게 되었다.
<혼불>의 시선은 언뜻 청암 부인과 이기채, 그리고 강모로 이어지는 양반계층의 지배질서인 듯 보인다. 유교를 근간으로 한 철저한 선비정신을 보여주는 매안 이씨 문중의 갖가지 생활상은, 지극하고 근엄하다. 우매한 독자라면 분명 처음 작품을 대했을 때 내가 보인 선입견을 여지없이 드러낼 만한 것이다. 반과 상이라는 명확한 계층구분과, 그것을 합리화하는 모든 제도와 관습 등을 대할 때, 이미 많은 가치가 퇴화하고 혹은 급격히 변화한 시대를 사는 현대인에게 어쩌면 이것은 고루하고 진부한 이야기쯤으로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혼불>의 시선은 피상적이지도, 단일하지도 않았다. 물론 작품에서 중심을 이루는 것은 매안 이씨 문중의 사람들이다. 청암 부인과 이기채, 그리고 강모와 효원, 강실이 등이 작품의 중심부에 놓여 살아가고 절망하고 다시 일어서고 있다. 그리고 그 근저에 대칭을 이루는 인물들과 사건이 있는데, 바로 거멍굴과 고리배미로 대표되는 민중들의 삶이다.
고리배미의 재산 있는 중로 엄장업이 벼슬을 얻고 싶어 공명첩을 샀다가 매안 문중의 노여움을 사 덕석말이를 당하였다는 이야기, 새우젓을 팔려고 신새벽부터 힘겹게 매안 거리를 거니는 새우젓장수를 새벽공부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방죽에 패대기를 친 선비, 다음 생애라도 서러운 천민의 신세를 벗고자 아비의 유골을 투장한 백단이 내외를 향한 이기채의 극한 폭력, 그리고 비명에 죽은 찬규의 목을 또 한 번 친 매안의 배타와 이기.
소설은 이렇듯 매안 문중의 철저한 유교윤리, 예와 전통을 중시하는 삶의 곳곳에 그 제도와 관습으로 억압받는 민중들의 모습을 교차해 보이고 있다. 지배계층의 윤리가 일으키는 모순과 그 모순으로 피 흘리는 민중들의 삶이 대칭을 이루면서, 소설은 단순히 양반계층의 질서가 갖는 전통의 미학에 머무르지 않고 새로운 시선을 띠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동계와 남평`으로 압축해 부를 수도 있지 않을까. 청암 부인의 상례 후 벌이는 매안 문중의 두 어른인 동계 이헌의와 남평 이징의의 대화는,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온갖 형식과 절차의 가치, 그리고 그에 반하는 모순을 날카롭게 피력하고 있었다. 소설은 그러나 동계나 남평 어느 한 곳에만 시선을 집중시키지 않고, "참으로 형님이라면 이에 어찌하시리까?"라는 의문으로 맺으며 독자인 내게 다시 생각의 고리를 넘겨주고 있었다.
물론 제도나 관습이 자체로 귀하고 가치 있다 하여도, 그것이 약자에게 굴레요 억압으로 작용할 때, 그것이 갖는 가치만을 따져 맹목적으로 고수하기를 강요하는 것은 분명 옳지 않다. 누군가의 희생 위에 세워지는 가치는 이미 그 자체가 모순인 때문이다. 꽃나이 강실이가 감내해야 하는 삶 속에도, 여성의 인간다운 삶의 배려가 전혀 없는 남성중심의 사회구조와, 반과 상이라는 계급체제의 냉혹함이 낳은 피지배계층의 원한이 그대로 서려 있지 않은가. 따라서 강호의 말처럼, "제도와 관습이라는 허울로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기회와 환경을 빼앗아 박살하여버린 횡포는, 마땅히 역사와 사회로부터 철회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 그것은 `철회`되었나. 나는 여전히 그 깊고 맑은 우물에 내 얼굴을 비추며 생각한다. 강실이라는 또 다른 약자를 통해 강자로 부상하려 했던 춘복이와, 그저 묵묵히 일하고 거기서 얻은 조금의 밥으로 근근히 살아가는, 그러다가 `문서`도 `절차`도 없는 삶이 설워 눈물짓는 공배는, 오늘 우리 곁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인가. 어디를 둘러보아도 산업화의 여진만이 산천을 뒤흔들 뿐, 과거의 약자는 현재의 약자를 낳고 마음 편히 승천하지도 못한 채 혼만이 서럽게 정처를 잃고 헤매고 있는데.
옛것의 형상도 이미 사라지고, 억압받던 약자들은 거개가 또다시 약자로 서성이는 이 대책 없이 변해버린 시대, 우리는 이제껏 너무 일면만을 바라보고 달려온 게 아닌가. 약자의 억압을 벗을 진보적인 대안도 없이, 우리가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묵과해버린 서구문물의 유입과 그것의 지속적 모방을 통한 현대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기이한 형상으로 거대해지고 보편화되었다. `혼불`은, 이 산업화의 한복판에서, 단순히 전통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 머무르거나 과거로의 회귀를 부르짖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산업화의 맹렬한 속도 안에서 단일하게 추구해온 가치를 날카롭게 지적하며, `동계와 남평`으로 대표되는 끝없는 대칭구도를 통해, 그러나 거기 엄연히 살아 숨쉬고 있는 공통분모를 포착해 나직하나 단호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 공통분모, 대립과 모순 속에서도 하나를 형성하는 것, 그것은 선조들 삶의 근간을 이룬, 명징한 정신의 뿌리였다. 나는 <혼불>을 통해 오래 전 잃어버린 내 근원의 샘물과 마주하며 다시 저 깊은 곳의 뿌리와 해후하게 되었다.
유년의 우물이 방치된 것은 농촌에도 바야흐로 산업화의 물결이 속속 스민 시기였다. 사람들은 이제 더는 우물물을 긷느라 새벽녘 잰걸음 하지 않아도 되었고 우물가에 모여 앉아 빨래를 하거나 나물을 다듬지도, 무슨 의식을 치르듯 정성스레 소제하지도 않았다. 우물은 커다란 나무판 하나를 떨어진 갓처럼 쓰고 진종일 해를 맞고 비를 맞고 눈을 맞으며 서 있었다. 나 역시 이제 다시 우물물에 얼굴을 비춰보지 않고 세상을 살아갔다.
우리는 그간, 아무런 비판 없이 자본과 결탁한 문명을 수용하고 거기 기생하며 너무도 쉽게 `근원의 삶`을 잊어버리고 내동댕이쳐 온 게 아닌가. 나는, 끝없는 속도에 함몰되어 그만 잊고 지내온 우리네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과 만나면서, 비로소 우물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온갖 관혼상제의 절차에 깃든 농밀한 철학, 연 하나를 만들어 날리는 데도 한없는 정성을 쏟고 정도를 지키는 선조들의 삶, 무심행으로 자신을 다스리던 그 지극함, 그것은 비단 양반들만의 모습이 아니었다. 생활은 다를지언정 소소한 일에도 정성을 쏟아붓는 그 지극한 마음결은 우리네 선조들의 한결같은 삶의 자세였다.
그러한 선조들의 삶과 만나며 나는, 우리 시대의 가벼움을 다시 한 번 분명하게 깨닫는다. 가벼운 화려함, 이것이 지금 우리 시대를 함축하는 언어가 아닐는지. 이 가벼움의 시대를 사는 내게 선조들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우물을 방치해둔 것에 대한 나무람이 아니었다. 다만, 어찌하여 샘물에 얼굴을 비추던 성찰의 기억을 잊느냐는, 그 뿌리를 응시하기를 멈추었느냐는 단호한 음성이 다시금 나를 부끄럽게 하였다. 나를 형성하고 있던 저 근원의 힘, 정신의 뿌리. 그것은 무엇도 함부로 여기고 허투루 해치우지 않는 정신의 지극함, 혼의 불꽃이었다.
청암 부인의 시퍼런 혼불을, 흡월정하듯 온 힘으로 흡입하던 효원, 그네의 가슴 깊숙한 곳에는 청암 부인의 혼불이 살아 타오르고 있었다. 지금, 옛것을 무조건 버림으로써 새로운 가치를 얻으려는 우리들에게도 어쩌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그만 잊고 살아온 혼불이 불씨가 되어 살아 있지 않을까. 이제 그 불씨를 되살려 우리네 가슴에 굳건한 뿌리로 타오르게 해야 하지 않을는지.
나는 오랫동안 우물의 뿌리와 눈을 마주하며, 태어나기도 전에 고였을 가슴속의 혼불, 그 불씨를 명경 위에 비추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