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꽃 향기

‘국화꽃 향기’를 읽고
한 여자의 힘겨운 출산 장면으로 소설이 시작된다. 제목처럼 상큼하고 깔끔하게 시작되면 좋을 것을 처음부터 죽음의 그림자를 암시하며 시작되는 소설이 왠지 달갑지 않아 주인공 여자인 미주를 보는 눈이 곱게 되지가 않았다. 아니 이미 죽기로 예정된 건데 괜히 그녀에 대한 애정을 갖는다면 소설을 다 읽고 난 후 나도 같은 아픔과 상실감을 느끼게 될까봐 두려워하는 내 이기심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미주`의 푸릇하고 도전적인 대학시절에서부터 사회의 큰 벽에서 힘겨워 하는 모습들, 또 크게 특별하지도 않은 것 같은데 `승우`라는 멋진 남자의 지극한 사랑을 받는 아름다움에 오히려 질투 섞인 곱지 않은 시선으로 책장을 넘겼다.
그러나 그녀가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남편과 아기를 위해 자신의 삶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고 투쟁하는 모습을 읽어가며 그녀에 대한 괜한 미움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아기…(생략)

니고 언젠가 만날 것을 계획하고 있었던 `승우`는 다시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그는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무수한 엇갈림 속에서 상처를 받는 것은 육체가 아니라 사랑을 담는 마음상자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그 마음의 보석상자를 `미주`에게 처음 열어주고 싶어하고 기다렸으며, 결국 그녀에게 청혼했다.
"국화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여, 나는 매일 온전히 당신의 그리움만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나의 사랑은 어느 누구라 해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내 사랑은 절대로 움직이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당신에게만 뿌리를 박고 살 수 있는 한 그루의 나무이니까요. 국화꽃 향기가 나는 사람이여. 나와 결혼해 주십시오." 결국 그는 그만의 깊이 있는 사랑을 인정받게 되어 `미주`와 결혼한다.
결혼 후에도 `미주`는 남편의 이해와 사랑으로 영화 일로 늘 분주했고, `승우`도 방송국에서 PD로 실력을 인정받으며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 단지 시부모님의 반대를 무릎쓰고 한 결혼이며 외아들인데 아이가 안 생기고 있다는 것말고는 걱정될 것이 없었다. 사실 누가 서른이 넘은 세 살 연상의 여자를 며느리로 두고 싶어하겠는가.
그런데 결혼생활 4년, 드디어 서른 넷에 임신을 했다. 그러나 산부인과 의사인 친구 정란에게 임신을 확인 받고는 그녀의 억지에 하는 수 없이 그냥 위 촬영 검사를 하게 된다. 그런데 거기에서 한참이나 진행된 위암 3기 판정을 받는다. 천국과 지옥의 거리는 10분 남짓한 거리였다.
미주는 대학 때부터 술과 담배에 불규칙한 식사 등으로 몸을 학대하다시피 해서, 만성 위장병을 달고 살았다. 친구인 정란은 그게 오래 전부터 못내 마음에 걸렸던 것이다. 정란은 병원에 근무하며 누구나 건강을 자신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게 없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고, 그래서 미주가 병원에 온 김에 임산부를 관리해 주려면 건강상태를 알아보아야겠기에 그냥 한번 검사한 건데...
죽음은 결코 먼 곳에 있지 않았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죽음에 미주는 정신을 차리기도 힘든 지경이었고 임신의 기쁨을 앗아간 것만 같은 친구가 미울 지경이었다.
의사들은 당연히 입원부터 해서 치료하고 상태가 이미 다른 기관으로의 전이까지 의심되는 정도니까 태아에 대해서는 신경 쓸 만한 상황이 아니라고 입원을 서둘렀다. 그러나 미주는 그 충격 속에서도 냉철하게 상황을 판단하고 결국 아이를 위한 결정을 내렸다. 암을 완전히 죽인다는 보장도 전혀 없는데, 멀쩡하게 자라나는 아기를 없애 버리다니, 그럴 수는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자기가 살겠다고 아기를 죽이는 것이 정말 내키지 않았기에, "아기를 보호해야 돼. 아기가 무사히 태어날 수 있도록 이제는 이것만 생각하고 그쪽만 보고 가는 거야. 내가 희망을 걸 수 있는 건 암 퇴치 같은 게 아니고 내가 가진 아기를 무사히 낳는 거야. 나와 승우씨 사이에 낳을 수 있는 유일한 아기잖아. 너무나 소중해"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영화사를 빠르게 정리하였고, 혼자서 고민하고 아파하다가 4개월이 되어서야 승우에게 임신 사실을 알렸다. 아무 것도 모르는 승우의 기쁨은 말로 표현 할 수 없는 감격 그 자체였다. 그러나 미주도 그 때부터 암의 통증이 시작되었다. 어느 한 부분을 찌르고 잘라 내는 듯한 통렬한 통증이 시작된 것이다.
승우도 곧 정란을 통해 미주의 병을 알게 되었고, 그 사실을 알고 난 후 승우가 느낀 서운함과 야속함, 안타까움, 분노, 충격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컸다. 그러나 "아무리 여자의 모성애가 강하다고 하지만 자신을 포기하면서까지 아기를 선택하는 여자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이제 명확한 건 부인의 목숨을 살리는 일이 아니라 아기를 살리는 일입니다. 그게 부인의 한결같은 뜻입니다. 30대 중반의 젊은 나이라면 어떻게 해서든 자기 목숨부터 구하려 하지 않겠습니까"라는 의사의 배려 깊은 설명과 격려에 승우는 미주에 대한 원망스런 마음을 정리하였다.
그리고 미주는 영화사를 정리하고 집에 있으면서 승우가 진행하는 음악프로에 무명으로 사연을 써보냈다. 암 선고를 받고도 사랑하는 남자에게 말을 하지 못하는 그 마음을 써보낸 것이다. "나 머잖아 당신을 떠나, 나 머잖아 죽는대, 하는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못하겠습니다. 그의 슬픔이 무서워서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나는 그를 떠날 수 없는데, 내 사랑이 그렇게 약해 보이는 것 너무나 싫기 때문입니다."
승우는 그 사연의 주인공이 궁금하고 도와주고 싶어했지만 설마 미주일 꺼라고는 당연히 상상도 못했다. 사연 속에 여인이 미주인 것을 알았을 때 승우는 가슴을 치며 울었다. 매일 한 침대에서 같이 잠을 자는 여자. 그리고 죽어 가는 여자. 자신의 아이를 낳기 위해 기꺼이 죽음을 선택한 그 여자의 마음을 그토록 오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승우는 정란에게서 진통제 복용 방법, 주사로 놓는 것 등 간호하는 것을 배웠다. 미주와 승우는 한 마디 병에 대한 언급 없이 일상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승우는 미주를 웃기기 위해 광대짓도 여전히 잘하고, 미주도 아무렇지도 않게 웃고 장난을 쳤다.
한 사람이라도 먼저 병에 대해 입을 열면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을 테니까, 그럼 태아도 위험하니까 서로가 무진 애를 썼다. 엄마의 통증이 아이를 위험하게 할 수 있기에, 엄마의 목숨을 주고 태어나는 아기가 건강하게 태어나게 하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고 조심했다.
김주미. 승우가 생각해낸 아이의 이름이었다. 친구인 정란이 딸이라고 가르쳐 주었고, 승우는 딸이 미주를 닮았을 것 같고, 그러길 바라고, 미주 속에 있었으니까 이름도 미주 속에 있어야 한다며 그렇게 짖기로 했다.
그러나 달이 차갈수록 미주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고 몰골도 말이 아니게 되었다. 뼈만 앙상하여 배만 불룩해진 그 모습...진통제로도 안 되게 되었을 때는 모르핀을 맞았고, 이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중환자였다. 임신 6개월이 되면서는 사흘에 한 번씩은 끝도 없는 가수면 상태에 빠졌고 모르핀도 하루에 열 개씩이나 맞았다. 전신을 찍어누르거나 창자를 시퍼런 낫으로 끊어내는 듯한 고통은 수시로 찾아들었고, 그녀는 이를 악물고 필사적으로 싸웠다.
또한 미주는 자신이 죽고 난 뒤 승우가 서른 두 살의 나이로 혼자서 아기를 키울 것에 대해 고통스러워했으며, 주미가 계모 밑에서 자라난다면 하는 생각이 암이 주는 통증만큼이나 미주를 괴롭혔다. 죽음을 앞둔 여자로써 사랑하는 남편과 아기를 두고 가며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하는 사실이 너무나 공감되었다.
그래서 미주는 아기 때문에 친구인 정란을 떠올렸다. 정란이라면 자신의 목숨과 맞바꾸다시피 한 더없이 소중한 딸을 맡겨도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미주는 극에 달하는 육체적 고통과 극에 달하는 마음의 고통, 그 이중의 지옥에 빠져 허덕대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거의 미칠 것 같았다.
봄이 될 무렵 미주는 드디어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그토록 원했던 아기를 낳고 보았다. 건강하게 아기를 태어나게 하기위해, 그리고 미주가 아기 얼굴은 보고 죽음을 맞게 하려고 여러명의 의사들이 사투를 벌이며 그녀를 수술했던 것이다. 결국 그녀는 아기의 얼굴을 보았고 미소지었다. 미주는 속으로 말했다. "내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당신 알지? 당신이 혹시라도 날 따라올까봐 내가 주미를 낳았다는 거 모르지? 주미는 당신의 사랑에 대한 내 선물이야." 승우는 주미를 미주의 얼굴에 바싹 붙여주었고, 숨을 거두려는 순간 미주의 마음을 읽은 승우가 그녀의 입술에 아기의 뺨을 붙여 주었다.
너무 소설 같은 이야기지만 사실 우리 생활의 불행과 행복도 소설처럼 찾아오지 않는가? 그들의 사랑과 고통을 너무 잘 묘사했기 때문에 허구라는 생각보다는 그들의 아픔을 공유하며 지금 내가 가진 것들에 대한 소중함 들을 일깨워 줄 수 있어서 귀한 소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미주는 길지 않은 생이었지만 세상에 태어나 그렇게 자신을 사랑해 주는 남자를 만나고, 자신의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아기를 고집해서 낳은 이유가 남편이 자신을 따라 죽을까봐였다니 그녀 또한 완전한 사랑을 하였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책을 읽는 내내 승우의 미주에 대한 사랑이 지극함에 "이럴 수가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에게 고정되어 끝없이 기다리고 사랑하고 이해하고 돕는 사랑, 이 시대에 "이런 것이 사랑이다."라고 진정한 사랑의 본을 보여주는 것 같다. 그리고 승우도 행복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 남, 여를 불문하고 화인(火印)맞은 것 같은 첫사랑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이루어 졌는데, 혹 그 사람이 먼저 죽었다고 해도 쉽게 잊혀지거나 변화되지 않을 것 같다. 안보면 멀어지는게 아니라, 더욱 간절해지는 사랑으로 잊혀지지 않을 것 같다. 승우가 생각했던 마음의 보석상자에 신비한 비밀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