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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맞물려 살아가는 `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이 소설은 고등 학교 시절에 선생님의 추천으로 읽었던 책이 었다.
자기 삶을 거리를 두고 바라보다 일제 말 강압적인 식민통치와 해방의 혼란, 좌우익의 대립과 민족 상잔의 전쟁 속에서 성장기를 보낸 사람의 삶을 몇 줄로 요약한다는 것은 얼마나 힘겨운 일인가? 한 개인이 절절히 풀어놓는 삶의 발자취를 몇 줄로 요약하는 것 또한 얼마나 재미없는 일인가? 박완서님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는 어설픈 요약이 원작의 맛을 그르치게 만드는 그런 작품이다. 한 개인을 어설프게 겉만 보았을 때 그의 슬픔과 기쁨, 고통과 즐거움, 그가 살아온 삶의 깊이를 발견할 수 없는 것과도 같다. 그만큼 한 개인의 역사는 만만히 보아 넘길 수 없는 거대한 세계이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소설의 주인공이며 실제 인물인 박완서는 참으로 기구한 시대를…(생략)
처럼, 얽혀 있으면서도 서로 독립된 부분을 갖고 있는 것이다. 세상이 달라져도 변치 않는 인간사가 있다. 인간 속에서 느끼는 고독, 미묘한 인간의 심리, 자의식, 한 단계 커가며 헤어지고 만나는 인간들.... 또한 이 작품에서 우리는 작가가 거리를 두고 자신의 지난 날을 돌이켜 보고 있음을 느낀다. 때로는 다른 이를 바라보듯 자신의 심리를 파악하고, 자기 피붙이에 대해서도 냉정한 판단을 서슴지 않는다.
친구가 방귀를 뀌면 코를 쥐고 창문을 열며 온갖 호들갑을 떠는 사람도 정작 자기가 방귀를 뀌면 의연하게 앉아 그 냄새를 맡는다. 남이 조금 안 좋은 일을 하면 게거품을 흘리며 비난해도, 정작 자신이 그런 일을 하게 되면 변명과 합리화를 일삼는다. 그러나 이 글에서 작가는 자신의 지난 날을 거리를 두고 바라본다. 그 때문에 우리는 인간의 삶을 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지은이는 총독부 관리가 되는 것을 최고의 성공 쯤으로 여기는 어머니나 집안 식구들에 대해 자신의 집안에 대해 가혹한 평가를 내린다.내 나라야 어느 지경에 가 있든지 간에 땅 파먹는 것보다는 붓대 놀려 먹고 사는 걸 더 낫게 치고, 더 낫게 치고, 이왕 붓대를 놀리려면 관청에서 놀리는 걸 더 높이 여기는 걸 보면, 반 의식 중에서 선비 정신은 빼 버리고 아전 근성같이 고약한 것만 남아난 게 우리 집안
의 소위 근지가 아니었나 싶다.
해방기의 혼란 속에서 좌익에 기울었던 자신의 행동도 솔직하게 드러낸다.그러나 나는 그때 그 혼란을 좌익과 우익, 진보와 반동의 대립이라는 이념적 관점으로 바라
보고 이해하려 들었고, 내가 박수 치고 역성들어 줘야 할 편은 좌익이라는 생각에 망설임이 없었다.
어머니의 맹목적인 자식 사랑이나 자기 중심적인 모순된 행동을 묘사할 때면 싸늘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그렇기에 그 냉정 어린 시선을 넘어 피붙이의 본능이 아닌 인간으로서 여자로서 어머니를 이해해 갈 때 그 애정이 더욱 값지게 느껴진다.
누군가 산다는 것은 긴 고통, 짧은 행복이라고 말했다. 행복의 순간은 짧고, 힘겨운 시간은 길다는 것이다. 인간이 태어나 행복을 누리는 시간은 짧다. 유년기는 그 행복의 절정일 것이다. 그리고 세상을 알아가고 많은 것들을 만나면서 고통은 시작된다. 누군가는 그 모든 만남과 앎이 크나큰 아름다움이라 말했지만.우리 자신을 돌이켜 보면 유년기의 추억은 삶의 충만한 기쁨으로 가득찬 시기이다. 이 작품
의 작가 역시 그랬다. 그는 자신의 유년 시절을 `야성의 시기`라고 이름붙이고 있다. 그냥 자연의 일부로, 변화하는 자연 속에서 경이로움을 느끼며 살았다. 산과 들에서 군것질을 하고, 놀이감을 발견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환희를 느끼고, 피빛으로 물든 저녁 노을에 비애를 느꼈다.
야성의 시기에서 벗어나 문명의 세계인 서울로 발을 들여 놓은 것은 한 단계 성장이었다.
마냥 풍성하고 너그러운 자연의 품 말고 또다른 세상, 아득바득 살아가는 삶의 현장이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은 또다른 세상을 알아가는 성장의 과정이었다.
그 다음 과정은 또 다른 세계에 속한 아이들과의 만남이었다. 초등학교 입학은 한 개인이 사회를 알게 되는 출발이다. 여럿 속에 섞인 나 자신을 보고 유대감이나 고독을 느끼는 때가 이 때이다. 사회를 알게 되면 그 사회의 어둠과 빛이 내게 드리우는 영향력을 느낀다.인간의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또한 사람과의 만남이다. 이미 할아버지나 할머니, 엄마등 피붙이의 애정을 통해 작가는 다른 사람과의 사랑과 미움이 어떤 것인가를 배웠다. 거기
에 친구와의 만남, 영향을 준 스승과의 만남이 이어진다. 작가 자신의 사춘기 시절 풋사랑의 체험을 하지는 못하지는 오빠의 사랑을 통해 간접적으로 사랑을 느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작가의 성장은 처절한 고통을 통해 이루어졌다. 글 쓰는 일을 자기 생의 과업으로 어렴풋이나마 느끼는 자기 발견의 순간을 맞은 것은 참혹한 전쟁 체험 뒤의 일이었다.
이 작품을 읽으며 우리는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 이 세상에 태어나 성숙해 가는 것의 비애, 엄숙함을 느낀다. 삶은 저녁 노을 처럼 처연한 아름다움이라는 것, 환희와 비애가 뒤범벅된 것이라는 것, 개인의 삶이 사회와 뒤엉켜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살아 있는 풍속 교과서이 소설의 가치는 성장의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는 것, 당시 사회상과 개인의 삶을 잘 연결지어 보여준다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 할머니 시대에는 이런 놀이를 하고 놀았구나, 이런 식으로 집을 꾸몄구나, 이런 이야기들이 유행했구나 하며 머리를 끄덕이게 된다. 그야말로 살아 있는 풍속 교과서다. 고향 박적골의 집 구조를 이야기하며 개성 지방 주거 양식의 특성을 알게 한다.
개성 지방과 그 근교의 주거 양식의 특색으로는 바깥채를 낮고 소박하게, 안채는 높고 정결하게 꾸미는 것과 함께 마당치레의 유난함을 꼽을 수 있다. 사랑채에 면한 바깥마당은 앞이 트이게 하고 양쪽에 뽕나무나 빗자루를 만드는 댑싸리나무로 둘러치고 함박꽃이나 국화를 몇 그루 심는 정도지만 뒤란치레는 공이 들고 화려했다.
풀로 각시를 만들던 놀이는 민요 속에서 듣던 바다. 어쩌면 그리도 섬세하게 어린 날들의 놀이를 기억하고 있는 지 놀라울 정도다.
풀로 각시를 만들어 쪽찌어 시집 보낼 때, 게딱지로 솥을 걸고 솦잎으로 국수 말고 김치를 담갔다. 마지막으로 쇠비름뿌리를 뽑아 열심히 `신랑 방에 불켜라. 각시 방에 불켜라.`주문을 외면서 손가락으로 비벼서 새빨갛게 만들어서 등불을 밝혀 주었다. 가지고 놀 것은 무궁무진했고 우리는 한번도 어제 놀던 걸 오늘 또 가지고 놀 필요가 없었다.
그뿐 아니다. 뒷간(화장실) 풍경이며 화장실에 얽힌 민간 신앙 등을 소개하는 대목도 흥미롭다. 서울 변두리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현저동 풍경이나 그 때 잘 먹던 눈깔 사탕, 물이 귀해 물장수에게 물을 사먹던 풍경 등 50여년 전 서울 풍경도 재미있다.
고약한 우연에 정당한 복수를 게을리 하지 않은 작가성장기를 써냄으로써 자기 개인의 삶과 자기 시대의 문화와 사회상을 섬세하게 재현해 낸 작가는 이 소설의 뒷 부분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그때 문득 막다른 골목까지 쫓긴 도망자가 휙 돌아서는 것처럼 찰나적으로 사고의 전환이 왔다. 나만 보았다는 데 무슨 뜻이 있을 것 같았다. 우리만 여기 남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약한 우연이 엎치고 덮쳤던가. 그래, 나 홀로 보았다면 반드시 그걸 증언할 책무가 있을 것이다."
그 예견처럼 박완서는 마흔 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문단에 등단하여 왕성한 창작 의욕을 불태웠다. 자신이 말했던 바대로 자기 시대를 다양한 소재와 방법으로 증언한 것이다.
박완서는 1931년 경기도 개풍에서 태어났다. 유년 시절을 고향 박적골에서 보내고 초등학교 때부터 서울에서 살았다. 숙명 여고를 거쳐 서울대 문리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전쟁과 결혼으로 학업을 중단했다.
그는 1970년에 [나목]이라는 장편소설이 <여성동아> 소설 공모에 당선됨으로써 문단에 나왔다. 마흔이라는 뒤늦은 나이에 작가 생활을 시작한 셈이다. 이후 그는 전쟁의 처절함을 다룬 소설, 여성 문제를 다룬 소설 등을 써냈다. 어느 소설이나 삶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 번득이고 있으며 작가의 뛰어난 글솜씨가 읽는 맛을 더해준다.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오만과 몽상] [그대 아직도 꿈꾸고 있는가] [미망] 등의 장편,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배반의 여름] [엄마의 말뚝] [꽃을 찾아서] 등의 단편을 썼다. [엄마의 말뚝]은 작가의 전쟁 체험을 고스란히 담아낸 작품으로, 그의 대표작이라 일컬어 지기도 한다.
박완서는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이어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를 펴냈다. 3년에 걸친 전쟁 기간 동안 보고, 듣고, 체험한 일들이 고스란히 담긴 소설로,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제 우리는 우리가 살아온 날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어떤 나날을 보냈는가. 내가 살던
시대는 어떤 시대였나? 그 시대의 모습은 어떻게 내 개인의 삶에 반영되었는가를 묻는다.
언젠가 우리도 증언하고 싶어 견딜 수 없는 내 삶의 나날을 기록할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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