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많던싱아는

정겨운 싱아의 추억을 되살리며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를 읽고
깨끗한 하늘에 문득 구름 몇 점, 신록의 푸르름이 더해 가는 이슬 머금은 산, 귓가를 부드렇게 스치는 상쾌한 바람. 비 온 뒤 상쾌하기 그지없는 5월의 풍경이다. 이렇듯 평화로운 자연과 달리 우리들이 사는 사회는 아무리 비가 와도 촉촉해지질 않는 것 같다.
현대를 삭막하고 인정이 메마른 사회라고들 한다. 물질과 권력의 포로가 되어 똑같은 것만을 쫓으며, 기계의 부속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 그 모습에 너무나도 익숙함을 느끼며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이 시대의 슬픈 현실이다. 모든 것들이 수치화되고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한 조건이 되는 이 공간들 속에서 우리는 분명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잊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쓴웃음에 지친 나를 달래려고 꺼낸 책이 바로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이다. 물론 TV에서 …(생략)

이라고 단정한 어머니는 어린 완서의 오빠를 이미 서울에 있는 학교에 입학시키신 분이다. 오랜만에 시골에 내려와서는 딸의 종종머리를 싹둑 잘라버리고 뒤통수를 허옇게 밀어버리고는 딸마져 서울로 데리고 온다.
그러나 어머니에 의해 끌려온 서울은 가히 환상적인 곳은 아니었다. 문 안과 문 밖의 집주인과 세입자, 전철과 지게 등 엄청난 대립과 갈등속에서 화자인 어린 완서는 박적골 낙원을 못 잊고 방황하며 서울 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말씀대로 문 안의 학교를 다니며서 신여성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주인공의 모습에 안쓰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의 뜻과 달리 학업에만 전전하는 지금의 나와 친구들을 생각하며 동정심마저 느끼기도 했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고향에서 맛보았던 싱아의 새콤달콤한 맛과는 달리 서울의 인왕산에서 따먹은 아카시아의 꽃은 비릿하고 들척지근한 맛이 난다. 그녀에게 싱아의 의미는 단순히 굶주린 입 안에 단물을 주는 식물이 아닌 자신을 안아줄 보금자리 같은 의미였던 것이다. 나는 싱아를 먹어보지 않아서 그 맛을 모르지만 무지의 내가 느끼기에도 싱아와 아카시아의 맛은 분명 다를 것 같다.
강한 생활력과 유별난 자존심을 지닌 어머니와 이에 버금가는 기질을 가진 소유자인 작가 자신, 이와 대조적으로 여리고 섬세한 성격의 오빠가 어우러져 살아가는 이들 가족은 차츰 서울 생활에 적응해 갔고, 오빠는 조선 총독부에 입사해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화자 또한 성실한 오빠를 본받아 열심히 학교에 다녀서 결국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6?25 전쟁이 발발하고 오빠의 죽음이라는 엄청난 시련을 겪으며 작가는 소설을 쓰겠다는 새로운 다짐을 한다.
작가의 어린 시절을 통해서 느껴본 우리네 자연의 소중함, 더 나아가 잃어버린 순수 동심의 세계까지 다녀온 감회가 새롭다. 보리새우 잡기, 실개천, 조찰떡 빚는 도깨비 이야기 같은 것들은 내가 실제로 경험한 것처럼 생생하게 다가왔다. 사라져가는 그 아련함 속에서 지나간 시절의 가치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 같다.
유년시절은 미래를 나를 찾기 위한 되새기고, 가꾸어야 할 얼굴이다. 바쁘게 살아가면서 자칫 지나치기 쉬운 주위의 모든 것들과 풍경에 대한 무관심 속에서 모든 것들의 깨끗한 시절이 더럽혀져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 그친 오후, 하늘을 바라보며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를 느낀다. 어릴적은 자연처럼 모든 것이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따스한 시절이다. 그 때를 떠올리며 환하게 웃음지을 수 있는 사랑만이 앞으로 다가올 시련과 고통을 저 멀리 하늘과 맞닿아 있는 능선처럼 부드럽게 넘길 수 있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