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저자 : 전혜린
출판사 : 민서
출발하기 위해 출발하는 것
아직 가을을 이야기하기엔 너무 이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여름도 채 다가오지 않은 지금, 나는 가을이 그리워진다. 얼마 전 우리나라와 독일 간 축구 경기가 있었을 때, `독일`이란 나라가 내 의식 속에 들어왔을 때, 나는 더욱더 가을이 그리워졌다. 독일에서의 가을을 지독히도 견디기 힘들어 했던 그녀가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전혜린, 내 동경의 대상, 나의 이상형, 나의 첫사랑. 전혜린, 그녀는 독문학자였다. 십 여권의 번역서가 있고 두 권의 유고집이 있는, 어찌 보면 평범한 지식인이었다. 좀 다른 게 있다면 55년, 그 어려운 시절에 독일로 유학을 갔다는 점, 서른 한 살의 나이로 자살을 했다는 것 정도. 그러나 아직도 전혜린을 기억하는 사람이 많고, 내가 동경하는 이유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의 삶이다. 보통 `불꽃같은 …(생략)

라는 싯구가 떠올랐을 뿐이라고. 전혜린은 항상 떠나는 것을 갈망했다. 아버지의 압박과 지식에 대한 끝없는 갈망으로 서울대 법대에 합격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일을 하기 위해 당당히 독일로, 출발하기 위해, 출발했다. 나는 그 출발이 그녀의 진짜 인생으로의 출발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그 용기가 나는 너무나도 존경스러웠다. 독일에서 그녀의 생활은 수필집에서도 느껴지듯이 찢어지도록 가난하고 힘든 생활이었다. 오죽했겠는가. 55년도에 타국에서 생활한다는 것이 보통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간간히 번역서로 들어오는 수입으로 연명했을 것임에도 그녀는 돈을 아껴서 책을 사 보았다고 말한다. 그녀는 가난이 재미있기까지 했다고 한다. 수필집의 절반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헤르만 헤세에게 생일 축하카드를 보냈더니 그림과 함께 감사하다는 답장을 보내줬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아- 헤르만 헤세와 같은 거장과 카드를 주고받았다니..대체로 그녀는 독일생활을 즐거워 했다. 그녀가 살고 있던 예술인들과 지식인들이 모여들던 슈바빙이라는 도시를 사랑했고, 뮌헨 대학에서 생활들을 재미있어야 했다. 처음엔 힘들었지만 뮌헨의 `와이셔츠를 푼 분위기`가 좋았다고 했다. 배우기를 좋아하고 알기를 좋아하는 그녀에게 독일은 충분히 보고 읽고 배울 것이 많은 나라였음이 틀림없다. 전혜린은 거기서 장 아제베도와 사랑에 빠졌고 사랑하는 딸 정화를 낳았다. 사랑은 인간을 모든 악으로부터 해방시켜주는 요새라며 정화에 대한 사랑, 장에 대한 사랑을 수필집에 표현했다. 그녀도 한 사람의 아내였으며 한 아이의 어머니였다. 독일에 대한 이야기는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나는 독일에 대해 그리 잘 알지 못했었는데, 이 수필집을 읽으면서 내 머리 속에 독일은 밤이면 노오란 가스등이 비치우고 봄이면 푄 바람과 축제가 시작되고 예술인에게 관대한 나라로 박히게 되었다. 겨울이 가까워지면 거리에 풍기는 군밤냄새, 두텁게 싸인 낙엽 태우는 냄새, 짙은 안개의 냄새가 나는 나라. 전혜린은 한국에 돌아와서도 독일을 종종 그리워했다.
전혜린은 항상 새로운 것에 대한 갈망으로 자신의 삶을 불꽃처럼 태워갔다. 수필집에서 그녀는 스물 아홉에 맞은 새해 때 심지어 카타스트로프를 기다렸다는 대목을 읽고 소름이 돋았다. 그녀에게는 재앙조차도 즐거운 일이었던 것이다. 가을이면 떠나고 싶은 갈망으로 병을 앓고, 자신에겐 집시의 피가 섞여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서른 한 살의 나이로 떠난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완벽한 순간을 원했다. 무한 속으로 자신을 내 던지고 맛보는 환희. 예를 들어 밤새 공부하고 맛보는 환희. 무한한 기쁨. 하지만 독일에서 힘든 생활을 하면서 그녀 자신도 모르게 조금씩 삶에 찌들어감에 따라 능동성, 그 환희를 맛볼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출발하기로 한 것이 아닐까. 그녀가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인생관만큼이나 진보적이어서 항상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 죽음과 생을 함께 의식하며 살아갔다. 죽음 조차도 새로운 출발이라 생각했음이 틀림없다.
문득 내 머리로 안도현의 `연탄불 차지 마라. 너는 그토록 온몸을 태웠던 적이 한번이라도 있는가." 라는 싯구가 스쳐 지나갔다. 전혜린. 그녀는 연탄불 만큼이나 온몸을 태웠던 사람이다. 지식인으로써, 배움에 대한, 떠남에 대한 끝없이 갈망했던 여자. 지식인 본연의 자세가 아닐까. 나는 나태해 질 때마다 그녀를 생각한다. 전혜린은 조금이라도 더 자신을 태우기 위해 노력했는데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녀는 31년, 짧은 생애를 살았지만 온몸, 온 정신을 다 불사르고 떠났다.
곧 가을이 오면, 떠나고 싶은 마음에 가을마다 병을 앓은 그녀가 또다시 생각날 것이다. 전혜린, 나는 그녀를, 그 열정을 사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