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깊이에의 강요

깊이에의 강요
나에게 쥐스킨트는 좋아한다, 혹은 싫어한다고 말하기 어려운, 공중을 부유하는 듯한 작가로 여겨진다. 장대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소박하지도 않은, 손에 꼭 쥐면 기분 좋아지는 정도의 이야기들. 처음 읽었던 그의 책은 ??향수??였지만, 이번에 읽은 ??깊이에의 강요??가 더 마음에 들고, 진짜 쥐스킨트에 가까워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소설을 평가할 때의 개인적인 기준의 하나가 `상상력의 깊이` 이다.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쥐스킨트의 상상력의 깊이는 심오하다. `향수`가 그렇고, 깊이에의 강요에 실린 세 편의 단편 역시 그의 상상력을 충분히 맛볼 수 있게 해 주는 책이다. 깊이 있는 작품이 모든 작가들의 소망이라면, 그 깊이의 허망함을 짧은 글을 통해 표현함으로써 쥐스킨트가 자신의 깊이를 드러내 보였다는 것은 다소 아이러니 하지 않은가? 이 책에 실린 `승부`, `장인 뮈사르의 유언`에도 이런 깊이에…(생략)

에게 불만사항을 늘어놓을 생각은 없다. 신도 조용하고, 나도 조용하다. 침묵과 침묵 사이에는 어느 한적한 시골 동네의 체스판도, 찢겨진 그림도, 내용을 까먹은 책들도 없다. 물론 원형 조개도 없다. 그저 아무것도 없을 뿐이다.
깊이에의 강요, 침묵은 깊고 무거운 것, 이런 것들이 한번에 머리속을 휘저어 놓으니, 책을 읽은 사람들은 물어볼 것이 별로 없어 침묵할 것이요, 잘 모르는 사람들은 알 수가 없어 침묵할 것이다. 어느 경우든 내가 글을 통해 그들을 침묵케 하였으니 별로 좋은 것은 아니다. 그들도 형용사로서의 침묵을 구현하게 하고 싶은데, 그게 되었으면 내가 구루지! 스스로 구현할 수 밖에 없다. 스스로 조용해질 수밖에 없다. 어쨌든, 변한다면 깊어지고 싶은 것이 소망인 나에게 형용사로서의 침묵은 당연한 과정이다. 소원을 이루었으니, 나는 또 떠들 것이 별로 없다. 침묵, 참 좋은 상태이다.
책을 펼치면 처음 시작되는 이야기는 표제와 같은 ??깊이에의 강요??이다. 간단히 내용을 보자면 재능 있는 화가가 ??깊이가 없다??라는 말에 처절히 무너지고 결국은 자살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녀의 뛰어난 재능은 어느 한 평론의 ??깊이가 없다??에 숨겨진 속뜻보다는 겉으로 드러나는 말의 보편적인 비판성만 강조된 채 신문에 떠벌려지면서 추락했고, 그녀 또한 텔레비전 방송탑의 꼭대기 139m에서 추락했다. 삭막한 삶이다. 극단으로 치닫는 화가의 삶을 묘사한 부분에서 과장이 없다고는 말 할 수 없지만, 자살로 끝나며 허무해짐과 동시에 새로 바뀐 평론이 읽혀지는 것은 묘하게 비극적이다.
온갖 가십기사에 즐거워하고, 좀 더 자극적이고 극단을 찾는 사람들, 생각하는 머리의 기능은 마비된 듯이 다른 이의 생각에 맞춰가는 사람들. 갑자기 짧지만 강렬하게 그 모든 것들이 싫어짐을 느꼈다. 하지만 곧 `나는 과연 그렇지 않은가?` 라는 의문이 고개를 들며 내 경멸을 부끄럽게 했다.
??깊이에의 강요??가 평소의 감정과 맞물려서 강한 기억을 남긴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의 다른 단편들은 그렇지 않단 얘기는 아니다. 다음에 이어지는 ??승부??는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들고, ??장인 뮈사르의 유언??은 엉뚱한 상상력에 매료되고 만다. ??문학적 건망증??에서는 살짝 작가의 속내를 들어볼 수도 있다. 단순한 나의 취향일런지는 모르겠지만, 쥐스킨트는 좀 더 단편을 써 주었으면 좋겠다. 짧지만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만들어주는 신비한 힘이 그의 작품에는 있다. 깊이, 그의 작품엔 확실히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