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나인것을 읽고나서 내가나인것2

내가 나인 것을 읽고나서..
선을 보러 나가서 찻잔을 앞에 놓고 상대방을 살핀다. 짙은 감색 정장 차림에 차분하고 진지한 인상의 남자라면 난 속으로 상상할 것이다. 아마도 그 다음 코스인 저녁 식사는 야경이 멋진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을 한 잔 시키고, 흔들리는 촛불과 장미꽃 한송이가 꽃인 투명한 화병을 번갈아 바라보며 나의 수줍은 어색함을 감추리라고. 그런데 웬걸, 이 남자가 일어나면서 자신있게 안내하는 곳은 대학가 뒷골목의 허름한 술집. 곱창이 볶아지는 매캐한 연기 속에 소주잔을 놓고 앉아 나를 언제 봤다고 일상의 자질구레한, 그렇고 그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솔직하고, 또 눈물이 나도록 재미나게 이야기 해 준다면...... 그와 헤어질 때, 나는 분명 그의 전화번호를 내 휴대폰에 저장하고 싶어질 것이다.
책에서 제목과 표지의 색이나 그림은 마치 사람의 외양과도 같다. `내가 나인 것`이라는 자못 심각한 제목과 노란…(생략)

긴장의 연속이다. 우연히 올라 탄 트럭운전사는 산길에서 뺑소니를 하고,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가 된 히데카즈는 공포에 질려 밤길을 죽어라고 달리는데, 도착한 곳에 웬 괴팍한 노인과 히데카즈와 동갑나기 여자아이 나츠요가 살고 있다.
이제 살았구나 싶어 그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날이 새니 그 뺑소니의 범인은 이 집 언저리를 맴돌고, 히데카즈는 그 놈의 범행을 말해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말 못할 사정이 생기고, 나츠요와 함께 일하러 갔던 밤나무 산에는 보물이 숨겨있다고 하고....물론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히데카즈는 집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엄마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네가 누구냐며 냉정하게 되묻고 그런 태도에도 기가 죽지 않는 히데카즈를 참지 못해 무참하게 때리고 넘어지고 울부짖고...... 히데카즈가 돌아온 후로 이 집에도 무언가 서서히 무너져내리는 조짐이 시작되는 것이다.
읽는 내내, 그리고 다 읽고 나서 나는 정말 작가의 역량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작가는 두 가지 이야기를 절묘하게 버무려서 어찌나 맛나게 했는지, 독자로 하여금 딴생각을 할 여지를 주지 않는다. 히데카즈가 가출을 해서 만난 세상과 히데카즈가 속한 가정의 이야기는 어쩌면 히데카즈의 이상과 현실이다. 히데카즈는 가출을 한 이후로 조금씩 달라지는데, 그건 누가 캐물어도 다 말할 수 없는 자신만의 세계가 생겼기 때문이고 사랑하고 보호해야 할 여자친구가 생겼기 때문이다. 아무리 발붙이고 살아가는 현실이 히데카즈를 짓누르고 여전히 별볼일 없는 아이 취급을 한다 해도, 그런 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 소설에는 역설적이게도, 히데카즈가 책상 머리에 앉아 일기장을 펼치고 `내가 나인 것`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기에는 상황이 너무나 긴박하다. 엄마, 아빠가 심각하게 싸우는 와중에서 두 번째로 나츠요를 만나러 갔을 때는 히데카즈도 마사나오에게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기지만 집에 돌아오니 집은 불에 타서 흔적만 남는다. 하지만 옆집에 누워 계신 엄마를 만나러 가는 것은 다른 형제가 아닌 히데카즈다. `여전히 엄마는 나를 보기 싫어하고 때리겠지만 나는 엄마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는 나라는 것을 알려주겠다`며 당당히 걸어가는 결말, 과연 그 집에 들어서자마자 히데카즈는 `모든 것이 너 때문이라며` 퍼붓는 엄마의 육탄공격을 맨몸으로 막아내야 할지, 아니면 드디어 엄마의 눈물겨운 따뜻한 포옹을 받을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무슨 상관이 있으랴. 히데카즈는 그 어떤 아이보다도 `나는 나`라는 것을 확실하게 아는 아이인데, 그것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온몸으로 말이다.
이렇게 나는 어젯밤 매력적인 남자를 만났다. 비록 와인을 놓고 사변적인 이야기를 나눈 것은 아니지만 손에 땀을 쥐게 하고, 듣다보니 기가 막혀 허탈하게 웃게 만드는, 내 감정을 그 사람의 손에 넘겨주어 마음대로 쥐었다 폈다 하게 만들었는데도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다. 이런 일을 어찌 말하지 않고 배기겠는가? 이제야 저제야 하고 가장 친한 친구의 전화를 기다리다가, 아니지 내가 먼저 말을 하면 되지 싶어서 수화기를 든 것이 2시간 넘는 수다가 되고 말았다. 수화기를 놓고 다시 보니 표지의 노란색은 질투와 분노였다. 펜으로 치밀하게 그려진 사내아이는 비록 무릎을 꿇기는 했지만 표정이 예사롭지 않다.
한 귀로 엄마의 잔소리를 듣기는 하지만, 날카로운 눈빛과 앙다문 입매에는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 꾹꾹 참는, 아니 해 봐야 `엄마가 나를 알아주기나 하겠어`라는 단절의 슬픔이 배어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자니 소심하면서도 어른에 대해 냉소적이었던 어린 시절 내 모습이, 또 한 편으로 히데카즈 엄마처럼 아이에게 끊임없이 비밀을 캐내려 하고 잔소리를 해 대는 지금의 내 모습이 동시에 떠올라 씁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