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지를 일고나서 중고등용 자료 대지를 읽고

대지를 읽고 ...
내게는 별로 좋지 않은 독서 습관이 있는데, 바로 세계적인 명작을 잘 읽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명작을 다 읽어야만 좋은 독서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지나치리만큼 그런 것들을 잘 읽지 않는다. 창피한 얘기지만 웬만한 초등학생들도 다 읽는다는 ‘어린 왕자’도 중3 때가 되어서야 접했다. 아무튼 이렇게 명작을 멀리해온 내가 ‘대지’라는 세계적인 작가 펄.벅의 작품을 읽은 동기는 이 책을 선물 받았기 때문이다. 작년에 한 선생님으로부터 예기치 않게 이 책을 선물 받았는데, 선물을 받았기 때문이었을까, 이 책을 빨리 읽어야만 할 것 같았다. 워낙 방대한 분량인데다 그림 하나 없어서 처음에는 매우 부담이 되었다. 빨리 읽어서 선생님께 말씀도 드리고 얘기도 하고 싶은데 책이 어려워 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나의 성급한 걱정에 지나지 않았다. 유능한 작가란 바로 이런 작가임에 틀림없다. 펄.벅은…(생략)

단 한 세대도 더 이어가지 못 하게하는 아들들이 너무도 미웠고, 허무했다. 왕룽은 땅은 우리들이 태어난 곳이며 이 땅을 파먹고 살아가고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굳건하게 지켜온 땅인데 그의 아들들은 눈에 보이는 재물에만 눈이 쏠려 다 팔아버릴 궁리만 하고 있다니.. 그리고 농촌 사회에서의 가치관과 현대 산업사회의 가치관의 차이를 실감나게 느낄 수 있었다. (‘대지’의 시대적 배경은 농촌 사회와 산업 사회의 과도기 인 듯 했다. 작품 중?후반에 가서는 혁명과 전쟁 이야기가 드문 듯 자주 나왔다.)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오란’을 꼽을 것이다. 그녀는 가난했던 왕룽이 부잣집에서 얻어온 아내다. 적족을 하지 않아 펑퍼짐한 발 때문에 왕룽에게서 사랑 받지 못한다고 여긴 오란은 (왕룽은 좀 부유해졌을 때 ‘롄화’라는 예쁜 첩을 두게 된다.) 매우 성실하며 헌신적인 아내였다. 늘 말이 없고 감정을 드러내지 않던 오란을 통해 동양의 전통적인 아내 상을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말과 원하는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적인 동양 그 특유의 분이위기, 사회적 풍조에 억눌려 가슴에 한을 품고 살아가는 동양의 여자들. 그런 오란의 한이 약하게나마 유일하게 분출된 때는 왕룽이 첩의 귀걸이를 만들어주기 위해 오란이 소중히 품어 오던 진주 두 알을 빼앗을 때였는데, 그 때도 오란은 한 줄기 눈물만을 흘릴 뿐이었다. 너무나도 슬픈 대목이었다. 왕룽의 가정을 일으키고 부유하게 만들고 평생 동안 가꿔온 오란이었는데.. 후에 왕룽이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오란을 극진히 대접해 주긴 하지만, 그건 이 때까지의 오란의 한에 비하면 나무 약한 것 같았다. 왕룽이 첩을 들일때, 소중히 간직해온 진주가 첩의 귀에 달린 것을 봤을 때, 오란의 마음은 어땠을까. 너무나도 슬프고 비참하고 왕룽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가정을 꾸려가는 오란의 모습에서, 나는 찬사를 아낄 수 없었다.
이 글에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왕룽의 집에서 놀고먹는 숙보와 숙모도 등장하는데, 정말 사회의 악이 아닐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조카의 재물만 탐내고 귀한 것만 취하려는 두 인물을 보며 아무리 상황이나 환경이 좋지 않다 하더라도 저런 사람만은 되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발정난 개 모양으로 돌아다니던 그들의 아들을 매우 증오하던 왕룽과 다른 가족들과 실로 절절히 공감하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나만 그런 것이 아니겠지만, 작품을 읽다보면 작가가 미국인이라는 점을 금새 까먹게 된다. 작품의 배경이 서양이 아닌 바로 이웃나라 중국인 점도 그 이유이긴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작품의 근간을 이루는 가치관 때문이다. 우리가 당연히 잘 알고 있듯이 자연에 대한 사고관점에 대해서는 서양과 동양이 완전히 반대의 입장에 있다. 서양은 자연을 정복하고 지배해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는데 반해 동양은 함께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대상으로 여긴다. 또, 오란의 모습에서도 동양적 가치관을 느낄 수 있다. 작가 펄.벅이 유년시절을 부모님 덕택에 중국에서 보내긴 했지만, 그래도 이 글을 미국인이 썼다는 사실은 내게 아직까지 이질적으로 다가온다.
펄.벅이 워낙 다작의 작가라 그녀의 모든 작품이 훌륭하다고 할 순 없지만 이 ‘대지’ 만큼은 펄의 작품 인생을 대표할 만한 훌륭한 작품임에 틀림없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게 무슨 그리 극찬 받을 글이라고.. 하고 생각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아닌 것 같다. 간결한 문체 속에 깊은 사색을 담고, 서양인으로서 동양의 아주 동양적인 면모를 작품화하기가 결코 쉬운 일이라 할 수 있을까. 게다가 그녀는 나의 명작들에 대한 두려움도 깨끗이 씻어준 고마운 능력도 가지고 있다. 예전의 나처럼 고전 명작에 울렁증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계기로 많은 훌륭한 작품들에 접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