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작품은 서정성이 넘치는 소설이다. 비정하거나 척박하거나 날카롭지 않고 인간의 정서가 부드럽고 아름답게 용해되어, 한편의 시를 읽는 듯한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작품이다.
소설은 원래 서사문학이기 때문에 시와는 다르게 현실의 상황을 핍진하게 개진함으로써 효과를 얻는 문학장르이다. 소설이 서정성이 넘친다는 것은 리얼리즘 소설의 입장에서 보면 결점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메밀꽃 필 무렵>은 오히려 이 서정성 때문에 성가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온 작품이기도 하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이 불변의 진리를 대대로 다시 한번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소설이 현실을 비판적으로 해부해 그 치부나 모순점을 들추어냄으로 하여 독자에게 충격을 줄 수도 있지만, 이 작품처럼 인간내면 깊숙이 흐르는 근원적인 욕망을 형상화하여 드러냄으로써 독자를 감동시킬 수도 있다.
이 작품이 지니고 있는 이러한 …(생략)
큰 양심의 가책을 느끼면서 상심하고 좌절하는 씁쓸함을 맛보게 된다. 우리는 이런 것들을 쟁취하기 위해서 투쟁하고,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이기도 한다.
여기서 허생원의 로맨스가 주요한 의미를 지니는 것은 바로 그 추억이 허생원을 살아가게 하는 원천적인 힘이 되기 때문이다. 허생원은 얼금뱅이에다가 재산도 하나 없는 장돌뱅이에 지나지 않은다. 가족도 없다. 그는 혼자일 뿐이다. 있다면 반평생을 같이 늙어 온, 그래서 이제는 허생원처럼 보잘것 없이 돼버린 한 외로운 나귀만이 있을 뿐이다.
가족도 없고 정착할 곳도 없는, 집도 절도 없는 사람은 고독할 수 밖에 없다. 뿌리 뽑힌 자의 서글픔은 나이가 들어가거나 늙어가면서 힘이 없어질수록 더욱 처량해지게 마련이다. 허생원이 바로 이런 처지에 있는 인물이다. 성서방네 처녀와의 일생에서 단 한번의 추억에 집착하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나귀처럼 볼품없이 늙어가는 허생원에게는 단지 의지할 것은 과거의 섬광같은 단한번의 아름다운 로맨스의 추억밖에 없다. 이것은 허생원에게 보물이나 다름없다. 허행원이 이 장에서 저 장으로 고달픈 이동을 할 때, 동료들에게 귀가 닳도록 자기의 로맨스를 들려주는 것도 이런 보물이 바로 자기가 고생을 하면서도 그것을 견딜수 있는 힘이 된다는 것을 은연중에 과시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의지처가 없다면 허생원은 벌써 병들어 누웠거나 고사했을지도 모른다. 사람에게는 희망이 가장 큰 힘이고 현실의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는 약이 된다.
이런 허새원에게 동이가 의미 요소로 소설에 등장한다는 것은 소설 구성상 심상치 않음을 나타낸다. 처음에 허생원과 동이의 관계가 소개될 때는 단순한 늙은 장돌뱅이와 아직 풋내를 풍기는 젊은 장돌뱅이에 지나지 않았다. 다만 충줏집에서 직접 맞부딭침으로 해서 어떤 긴장관계가 조성될 뻔 하였을 뿐이다. 그러나 이것도 동이가 순순히 물러남으로 싱겁게 끝난다. 이렇게 관계과 지속되었다면 이 소설은 정말 무의미하거나 가치없는 것이 되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효석은 이에 머물지 않고 더 충격적인 결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동이와 허새원의 혈연관계로,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맺는 극적인 결말을 준비해 둔 것이다. 소설의 초두에 이미 이효석은 복선을 깔아놓았았다. 허생원을 등장인물로 설정할 때, 그가 왼손잡이임을 강조한 것은 바로 복선이다. 이런 묘사가 있었기에 끝 장면에서 동이의 채찍이 왼손에 쥐어졌음을 인상깊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런 서사 진행을 이 한가지 모티브, 즉 왼손잡이의 상징성에만 전적으로 의존하기 않고 있음을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이 한가지에만 의존하였다면 그 작위성이나 꾸밈으로 인해 독자들의 질타의 대상이 되었거나 불신의 대상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왼손잡이 복선이 소설의 기교로는 그럴듯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미흡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작품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이런 취약한 구조를 또 다른 구조가 든든히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또 다른 구조란 바로<여로의 구조>를 일컫는다. 여로의 구조란 쉽게 말하면 여행의 구조를 말한다. 소설을 여행하는 순서로 짰다는 뜻이다.
처음 허생원이 드팀전을 걷을 때부터가 시작이라면, 이것은 여름 장날의 무더위가 식을 무렵이어서, 같은 여로라고 밤길을 걷게 되고, 그 담이 달밤이기 때문에 즐거운 여로가 될 것은 쉽게 짐작되는 바다. 여로지만 휴식이 동반된 길이다. 거기다 메밀꽃까지 핀 길이기에 서정성까지 넘쳐 흐른다. 이런 길은 야박하거나 삭막하지 않다. 이런 여로의 구조를 통해 허생원은 자기의 옛추억을 이야기 할 수 있었고, 거기다가 아들까지 얻게 되는 것이다.
원래 여로는 탐색을 위하여 소설에서 자주 차용되는 기법이다. 무엇인가를 발견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숨겨진 곳을 위험을 무릅쓰고 탐험해야 한다. 이 탐험의 길이 곧 발견의 길이고, 인생으로 말하면 인생의 탐색, 곧 도의 길이고 깨달음의 길이다. 허생원이 밤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한 공간 이동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만일 단순한 공간이동이 주목적이었다면 이 행위는 소설에서 의미있는 요소가 될 수 없다. 그것으로 끝났다면 애초에 소설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작품이 소설다워질 수 있었던 것은 여로의 구조를 통해 무엇인가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로 구조는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작품도 또한 떠돌이가 고향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며, 뿌리 뽑힌 자들이 의지할 곳, 영원한 안식처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그러나 황석영의 작품 배경은 처음부터 이효석의 그것과는 정반대다. 떠나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한 겨울 눈이 내리는 황량한 벌판을 나서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게다가 주인공은 마땅한 직업이다. 직장도 없는 상태이며 갈 곳도 없는 인물이다. 같이 나서는 인물도 마찬가지다. 불안정의 상태이며, 배경적으로는 한파가 몰아치는 냉기 속에서 사건이 진행됨으로 해서 이효석의<메밀꽃 필 무렵>처럼 서정성이나 아름다움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도 없다. 결말도 이 배경에 걸맞게 비극적으로 끝난다. 고향을 찾아 나선 주인공에게 확인되는 것은 폐허가 된 고향의 삭막함이다. 고향상실은 인간적 가치가 여지없이 짓밟혔음을 의미한다. 이 소설에서도 여러 구조를 통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하여 주나 그것은 앞서의 <메밀꽃 필 무렵>과는 반대로 고향의 상실과 고통, 끝없는 유랑이 계속될 수 밖에 없는 현대인의 비애를 재확인하게 해 줄 뿐이다.
|
인 쇄
바로가기저장
즐겨찾기
링크복사
외부공유
메밀꽃 필 무렵을 읽고 메밀꽃필무렵을 읽고.hwp (3 Page)
장바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