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래의 여자

모래의 여자
아베 코보의 <모래의 여자>는 일상으로부터 탈피하려는 평범한 한 남자의 사투가 결국은 비슷한 구조와 모습을 한 또 하나의 일상으로 환원되는 과정을 실감나게 그려 보인다. 그것은 똑같지는 않지만, 결국은 그게 그것일뿐인,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서사이다.
남자는 평범한 학교 선생으로 곤충 채집을 취미로 하고 있다. 특별한 취미는 아니지만, 부인을 제외하고, 그의 취미에 대한 아는 사람은 없다. 그에게 그것은 단지 취미가 아닌, 취미 이상의 의미를 갖는 특별한 것이기에, 누구도 그것에 대해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되는 탓이다. 곤충 채집은 무엇보다 직접적인 즐거움을 준다. 모든 것을 잊고 오직 그것에만 몰두할 수 있는 기쁨이 거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곤충 채집은 그의 이름을 세상에 남길 수 있는 특별한 기회이기도 하다.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던 미지의 곤충을 발견하기만 한다면, 라탄어 학명과 그의 …(생략)

운 마을로 땅의 거의 전부가 모래로 덮여 있다. 마을 중앙에 우뚝 솟은 망루를 제외하고는 첫 눈에 별 특이한 점이 없는 곳이었지만, 마을의 중심을 지나 바다에 가까와 질수록, 이상하게 기분이 나빠지는 곳이다. 아마도, 그것은 마을의 구조가 아주 특이한 탓일 것이다. 마을을 다 지나, 바다가 보이는 지점에서 돌아보면, 그 마을은 마치 부서져가는 벌집 모양과 같았다. 바다로 갈 수록 점점 낮아져야 함에도, 거꾸로 점점 높아지는 지세가 이상했고, 길은 점점 높아지지만, 집은 그대로 평지에 남아 있는 모습은 더욱 이상했다. 하지만, 오직 신종 곤충을 발견하는 데에만 몰두했던 그에게 그 모든 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모래가 있고, 거기에 있을 미지의 곤충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그는 족했던 것이다.
신종 곤충을 찾아, 바다가 보이는 사구의 능선을 따라 걷던 중, 그는 그의 정체를 의심하는 마을의 한 노인을 마주친다. 노인은 그가 단지 곤충 채집을 취미로 하는 학교 선생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그가 묶고 갈 집을 알아 봐주겠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리 저리 캐묻는 노인의 의심을 순진한 어촌 사람들의 단순한 경계심으로 치부하고 하룻밤 묶고 가라는 노인의 제안을 받아 들인다. 사실, 그는 곤충 채집에 정신이 팔려, 하룻밤 묶고 갈 여관 따위엔 관심도 없었던 터이다.
그가 하룻밤을 묶게 된 곳은 그 마을의 끝, 그러니까 그가 곤충을 찾아 헤매고 다녔던 사구의 능선 아래 쪽에 있는 어떤 여자의 집이다. 차라리, 집이라기 보다는 거대한 우물에 가깝다. 바닥에서 지상까지의 높이가 수십 미터에 이르는 곳으로, 사다리가 없으면,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곳이다. 게다가 벽은 모래여서, 누군가를 가둬두기엔 더 없이 좋은 곳이다.
이것 저것 캐묻던 노인의 경계심을 한번쯤은 의심해야 했던 것일까? 이상한 집의 구조에서 누구나 느껴야 했을 본능적 불안함을 의식적으로 경계해야 했었던 것일까? 그는 갇히고 만다. 무의식적으로 막연히 느꼈던 감금의 공포가 어처구니없게도 현실이 된 것이다. 마을에는 그가 갇힌 곳과 같은 형태의 집이 여러 채 있다. 모두 바다에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는 데, 그가 어제 사구의 능선에서 돌아봤던 마을의 모습이 벌집처럼 보였던 이유는 바로 이 구멍과도 같은 집들이 타원의 행렬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다 쪽에서 마을로 끊임없이 모래가 밀려든다. 두더지가 된 사람들이 그 모래를 퍼내지 않는다면, 마을은 곧 모래로 뒤덮혀 버릴 것이다. 그러니까, 그는 모래를 퍼내는 두더지가 되어버린 것이다. 여자 혼자 감당하기 힘든 노동력을 보충해 줄 남편 두더지가 되어 버린 것이다. "모래 벌레". 그가 애초에 찾았던 것은 자신의 이름이 되어 줄 미지의 벌레였지만 , 결국 그가 찾은 것은 모래 벌레가 되어버린 자기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는 수 없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리고 한번은 구멍 밖으로 나오는 데 성공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사다리 구실을 할 수 있는 충분한 길이의 줄을 모으고, 그 줄들을 이어 붙이고, 줄 끝에 닻 구실을 하는 가위를 매달고...하지만,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붙잡혀, 다시 구멍에 갇힌다. 이후에도
이후에도 그는 탈출을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지만, 그것은 어느 새 탈출을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궁리를 위한 소일 거리의 형태가 된다. 그는 어느 덧 그 곳의 생활에 적응하게 된 것이다. 천장에서 흘러 내리는 모래를 막기 위해 우산을 쓰고 먹어야 하는 식사에 적응하고, 신체의 구멍이란 구멍엔 파고드는 모래에 적응하며, 여자의 몸에 적응하고, 일주일에 한번 씩 배급되는 한 동이의 물에 적응하고, 매일 밤 몇 푸대씩 규칙적으로 퍼내야 하는 노동에 적응하고... 그는 이번에도 적응한 것이다. 예전에 그가 선생으로서, 한 아내의 남편으로서 적응해야 했듯이. 그리고 또한, 예전에 취미를 가졌듯이, 이번에는 그는 취미를 갖게 된다. 모래에서 물을 추출하는 장치를 고안하는 데 몰두한 이후 더 이상 탈출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인내란 딱히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인내를 패배라고 느끼는 순간부터 진정한 패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책의 209쪽을 펼치면 이 말이 나온다. <제길, 대체 넌 누구야!> 펼친 페이지에서 바로 시선을 왼쪽으로 약간 움직여 208페이지를 보면 이 대사가 눈에 들어온다. 제 2장의 첫 머리에는 이런 노래가 나온다. 짤랑 짤랑 짤랑 짤랑 무슨 소리? 방울 소리? 짤랑 짤랑 짤랑 짤랑 무슨 소리? 귀신 소리? 모래 속의 여자가 부르는 노래는 무척 모호하고 낯설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타인에게 얘기하는 것이기는 해도 스스로 꿈꾸는 것은 아니다.` `엉겁결에 받아들고 보니, 그것은 카드가 아니라 편지였다. 편지는 물렁물렁, 촉감이 이상했다.` 말 그대로 물렁물렁한 편지다. 물침대와 비슷한 것인가. `걷지 않아도 되는 자유.` `하기야 없어서는 안될 것들 뿐이라면, 현실은 슬쩍 손도 댈 수 없는 위험한 유리 세공품이 되어버린다.`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구절들이다. 문득문득 당신의 저 깊숙한 심장이 먼저 흠칫 가벼운 떨림으로 울 것이다. 아하 그렇지. 이것은 모험이다. 곤충채집을 나선 한 교사의 지난한 탈출기이다. 그 속엔 뭐가 있나, 따분하고 지리한 일상이 다른 방식으로 녹아있다. 1.8미리의 모래더미 풍경에서 그가 찾는 것은 여러 발 달린 희한한 곤충들일 뿐이다. 마치 야만인을 기다리는 문명인처럼.
우선, 이야기가 흥미롭다. 어느 정도의 서스펜스도 느낄 수 있고 무엇보다도 남자의 심리묘사가 흥미로운 소설이었다. 만일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난다면. 우리의 일상의 일들, 일어나기, 신문보기, 라디오 듣기, 산책하기로부터 단절된 채 감금당한다면. 일상의 의미와 현대인의 단절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소설인 것 같다.이러한 광경과 상황은 내평생 스스로는 떠올릴 수 없는 것이기에 작가가 존경스러울 뿐이다. 하지만 여성이 객체화되어 남성의 성적욕망을 채워주는 대상. 수동적으로 남성이 이끌어주기를 바라는 부정적인 모습의 전형이라는 점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