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과 머저리를 읽고나서 병신과 머저리3

며칠 전 8월 15일, 광복절에 하는 여러 다큐멘터리, 특집 드라마에 식상해 있던 나는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대기에 바빴다. 그러다가 우연히 케이블 TV 한 채널에서 우리 민족의 격정기를 살아오신 노인 분들이 참여하는 TV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다. 그 때는 볼 것이 너무 없어서 그냥 보고 있었지만, 예상 밖으로 재미있었다.
그 프로그램은 험난한 역사의 파도를 헤쳐온 나이 드신 분들의 시각에서 바라본 현대 사회를 재조명하고 있었다. 프로그램에 나오신 노인 중 한 분은 마지막 마무리를 할 때, 이렇게 풍족하게 잘 살고 있는 것은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이라며, 자신들이 땀 흘리며 열심히 일했을 나이의 사람들이 흥청망청 놀고 있는 것을 보면 비록 나라를 위해 싸우기는 했지만 자신들의 희생이 가치를 잃어 가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며 눈물을 비치셨다.
여기서 나는 불현듯 며칠 전에 읽었던 ‘병신과 머저리’ 라는 책을…(생략)

을 맺어버린다. 그 사실을 알게 된 형은 말한다.
“임마, 너는 머저리 병신이다. 알았어?”
형은 동생의 비겁함과 소심함을 비판하고, 자신이 관모를 죽이는 적극적인 선택으로 소설을 고쳐 쓴다.
동생은 마지막에 이렇게 서술하고 있다. 형은 자기를 솔직하게 시인할 용기를 가지고, 사실에 순종하여 관념을 파괴해 버릴 수 있는 힘이 있었다고. 형은 그 아픈 곳을 알고 있었으니까... 그만한 용기는 계속해서 형에게 메스를 휘두르게 할 것이라고...
그에 비해 자신은 아픔만이 있고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 자신의 환부는 어디인지 고민하고 있다. 그로 인해 깨져버린 자신의 화폭, 그 것을 다시 시작하기 위하여 자신은 지금까지보다 더 많은 시간을 망설이며 허비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나는 ‘병신과 머저리’를 읽고 한참 멍해 있었다. 도대체 이 것이 무슨 이야기인가. 나에게 주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그 것에 대해서는 나중으로 미루더라도 나는 실연의 상처보다는 6.25 전쟁으로 인한 상처가 더 크지 않을까, 왜 형은 자신의 소설에서 관모를 죽이고, 현실에서도 관모를 압도하면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고 있는데 동생은 왜 고민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근원을 모르는 상처는 잊어버리면 그 흔적이 남지 않지만 경험으로 생긴 상처는 그 기억의 단편들이 맞춰질 때마다 회상되어 흔적이 남지 않느냐는 의문이 생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한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근원을 모르는 잡초가 깊게 뿌리내리는 것처럼 근원을 모르는 상처가 더욱 마음 속 깊이에 뿌리 박힌다는 사실을 말이다.
전후 세대인 나는 전쟁을 직접 겪어보진 못했다. 그러나 상이군인이신 할아버지의 말씀을 들어보면 일제 치하에서의 상처가 채 아물기도 전에 일어난 전쟁이라는 점, 그리고 같은 핏줄 간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깊은 상처를 남겼다고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할아버지는
“옛날이 좋았다.”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어릴 때 나는 그 것이 단순히 지나간 과거를 회상하는 넋두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다시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 말이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 든다. 비록 힘들고 어려웠을지라도 인정이 살아있던 시절, 잘 살아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자신을 내던질 목표가 있었던 시절.
그에 비해 지금은 몇 배 더 잘 살고 있지만 소비 지향성 문화만이 남아있을 뿐 뚜렷한 목표가 없는 상황에서 활기 있던, 이룰 것이 있던 옛날을 더 그리워하시는 지도 모를 일이다. 비록 6.25가 끝났어도 나아진 건 없었지만 전쟁 세대는 아픔을 겪고, 그 아픔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았기에 더 빨리 헤쳐 나와 이 같은 번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병신과 머저리’ 에 나오는 형과 동생도 마찬가지이다. 낙오병이었던 형이 실제로 누구를 선택하여 사살하였든지 간에 그는 자신의 상처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사실에 순종하여 ‘관념의 성’을 무너뜨리고 다시 메스를 잡을 용기가 있었다. 하지만 동생에게는 구체적인 상처가 없으니 아픔의 정체를 파악할 수도 없고 그 것을 치료해야 할 방도를 발견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동생은 현재 자신을 이렇게 말한다.
어쩌면 자신이 그리던 얼굴은 자신의 힘으로는 영영 찾아내지 못할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마지막 한 마디로 모든 것을 압축한다.
‘나의 아픔 가운데에는 형에게서처럼 ’명, 료, 한‘ 얼굴이 없었다고 말이다.
방향을 잃어버리고 돌아가는 수레바퀴...
식민지 통치도, 전쟁도 겪지 않았던 전후 세대에게 TV에 나오셨던 노인들은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씀하시지만 어쩌면 더욱 더 내적으로 힘든 삶을 살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전후 세대인 우리들에게는 ‘명료함’이란 없다. 불투명한 스모그 속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동생’의 고민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고민인지도 모른다. 아픔만이 있고 아픔이 오는 곳이 없는 상처를 갖고 있는 우리의 현실...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아성찰과 뚜렷한 목표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상처를 알고 있던 형에게 극복 의지가 더해져 마지막 부분에서 관모를 다시 만났을 때 대항할 수 있었고, 오히려 강자인 관모가 도망쳤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는 우리의 책임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비록 다시 시작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지만 말이다. 마지막으로 명언 한 구절로 이 글을 마치려 한다.

-사람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괴로움을 안고 살아간다.
다만 그 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그 고통의 무게가 다르게 느껴질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