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인간은 자신이 한번 옳다고 정한 일에 관해서는, 그것을 확실히 대체할 수 있게 되기 전까지는 믿었던 것을 포기하지 않고 꿋꿋하게 도모하려는 습성이 있다. 이것을 신념이라고도 하고, 아집이라고도 하는데, 그 무엇이건 간에 동기가 선하다 하여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니며, 동기가 선하지 않다 해서 결과가 나쁜 것은 더더욱 아니다. 때문에, 오히려 자신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 것은 불행의 싹이 될 수 있다.
그 한 예로, 공화정체에 대한 신념을 믿어 의심치 않고 이를 행동에 옮겼던 브루투스는 결국 그 자신의 시대에 엇나간 신념으로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그의 신념대로 변화한 것은 하나도 없는, 정체(停滯)된 14년의 역사만을 남긴 채로……. 반면 그에게 죽음을 당한 카이사르는 어떠했던가? 물론, 그의 개인적인 차원의 동기는 별로 선하다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사적인 권력욕이 그의 동기였음은, 부…(생략)

스탈린이라는 관리자보다는, 트로츠키나 레닌 같은 창조자가 높이 평가되듯이, 세상 사람들은 단순한 관리자보다는 뭔가 특출한 ??창조력??에 매력을 느끼기 때문이다.
창조적 인물, 카이사르는 과연 자신의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보지 못했을까? 나는 분명히 확신한다. 카이사르는 보고 싶지 않은 현실을 보았다고. 단지, 창조자로서의 멋진 최후를 맡고 싶어한 건 아닐까? 그의 편지는 모든 걸 설명해주리라 믿는다. 창조자의 고뇌와 로마의 특별한 고뇌를….

― 카이사르가 브루투스에게
오랜만일세. 친애하는 마르쿠스. 지난 편지는 아주 잘 받았네. 그럭저럭, 자네가 뭔가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는 것은 깨달았음이야.
히르티우스가 자네와 데키우스, 카시우스 등이 나에 대한 일을 논의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네. 며칠 후, 원로원 회의에서 나에게 닥칠 일 말일세.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는 묻지 말게. 어차피 난 자네들의 시도를 막을 생각은 없다네. 단지, 지금은 자네들, 나에 대해 모이는 무리들에게 해줄 말이 있어서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것일세.
마르쿠스, 자네는 로마의 역사를 어떻게 보는가? 7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우린 많은 발전을 이룩했지. 로마는 본국의 많은 민족들을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이면서, 한니발 전쟁 때처럼 까마귀를 만드는 실용성을 추구하고, 과거의 적을 우리 로마의 친구이자 우방으로 만드는 우리의 관용을 관철시키며 발전할 수 있었네. 이것들은 우리 로마를 지중해의 특별한 국가로 만들었고, 지중해는 우리의 바다가 되었지. 마침내 로마의 국토와 힘은 ??제국??이라 불릴만한 모양을 갖추게 됐네.
우리의 족적이 확실히 보이는 것 중의 하나로, 우리의 가도(街道)를 볼 수 있겠지. 자네도 알거야. 우리의 가도를…. 그것이야말로 ??로마의 전통?? 아니겠는가? 그래, 우리의 전통이지. 타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발전했던 우리의 개방성의 상징이었고, 신속한 군사 작전을 고려한 우리의 실용성이며, 패배자의 땅에 가도를 세움으로써 로마화의 물결을 치게 만들어 우리의 친구가 되게 했던 우리 관용의 상징이었네. 이것이 우리 로마의 전통이지. 개방성과 실용성과 관용. 이것이야말로 우리 로마만의 특별한 정신이라 생각하지 않는가?
그것은 우리 로마인이 우월해서가 아니란 것을 자네도 알거야. 우리에겐 아무 것도 없었지. 우리에겐 체력도, 재력도, 해운력도, 우위를 점한 것이 아무 것도 없었어. 그렇지만 우린 우리 주변의 ??우위에 있는 민족??을 차례로 로마화시켰고, 우리의 친구로 만들었네. 이것이야말로 체력, 재력, 해운력 같은 여타의 일반적 요소가 아니라, 우리 로마만의 정신, 개방성, 실용성, 관용이라는 특수한 요소 때문이란 것을 입증하는 게 아닌가? 그것이야말로 우리 로마인들의 발자취이고, 힘찬 발걸음의 밑바탕이란 말일세.
자네도 아다시피, 난 원로원 의원 수를 900명으로 증원했고, 갈리아인들과 같은 타민족의 원로원 진출을 허용했네. 자네들은 그것이 불만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그건 우리 로마인의 전통과 역사를, 그리고 우리 로마에 무엇이 국익이 되는 지를 망각한 것이 아닌가….
자네들이 옳다고 생각하는가? 만약 타민족에 대한 개방을 문제삼는 것이라면, 자네는 우리 로마가 여지껏 본국 이탈리아의 많은 민족과 그리스인, 에트루리아인들에게, 그리고 동맹 시 전쟁 이후 모든 라틴인들에게 로마인의 지위를 준 사실을 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밖에 되지 않아. 우리가 포용하고 받아들이면, 그만큼 우리에게 돌아오는 게 있는 법, 로마인의 실리적 처신들은 역사에 기록되고 모범이 될 것이며, 관용은 전통으로 두고두고 이어져 우리의 거대한 힘이 될 것일세. 보이지 않는, 그러나 강력한 힘으로 말이네. 그 힘을 다른 나라가 알아채기 전에, 우리만의 정신, 미덕으로 그것을 고착(固着)시키진 못할 망정, 그것을 포기하려 한다면, 자네는 로마인이고 싶지 않다는 건가?
개방과 실용, 관용의 노선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아니라면 뭔가? 정치체제를 바꾸는 것에 대한 불만인가? 아무래도 나로서는 그렇게 볼 수밖에 없군. 불만의 이유는 진작에 알았지만, 사실 히르티우스한테서 자네들의 일을 듣고서는 한 동안 실소를 금치 못하였어.
이보게. 이 세상, 이 나라, 이 민족을 통틀어 어떤 상황에서나 활발히 제 기능을 발휘하는 정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네. 아테네의 민주정은 민주적이지 못한 남자, 페리클레스에 의하여 번성했고, 이후 충분히 ??민주적인?? 사람들의 통치는 중우정치로 아테네의 몰락을 가져왔지. 오랜 옛날에는 사람들이 모두 공평히 나눠가졌던 평등한 공산제의 사회가 있었지. 하지만 지배층이 나타나면서 그것은 무너졌어.
그렇다고 해서 공산제 사회의 그 옛날 사람들이 불행했던 건 더더욱 아니지. 기술이 발달하고 상황이 맞게 된다면, 언젠가, 모두가 평등한 사회가 올 수도 있을 것이야. 하지만 모두 여건이 맞아야 가능한 일이지. 자네들이 모든 상황들을 고려하지도 않고 정치 체제에 변화를 바라지 않는다는 것 또한, 역시 자네들의 개방되지 못한 닫힌 마음, 전통에 얽매이는 우유부단함과 함께, 같은 로마인인 속주민에 대해 관용적이지 못함을 상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어찌 깨닫지 못하는가….
변화라는 것은, 필요에 의해 발현되는 것일세. ??지킨다??라는 것은 상태를 유지한다는 뜻과 함께, 더 이상 나아가지 않는다는 뜻을 내포하지. 나는 로마의 발전을 여기서 정지시키고 싶지 않아.
자네는 왜 공화정이라는 과거에 집착하는가? 과거는 참고 자료일 뿐, 교본은 아니야. 그리고 과거는 현재를 준비하는 과정이지, 미래를 약속할 복음은 아니라네. 자네들은 모르고 있어. 자네가 과거에 집착하면 할수록, 현재는 과거와 자네들에게 등을 돌리고 과거는 현재와 단절되어 버리네. 결국 과거가 자네 영역 속의 사생아가 되어 버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자네들에겐 아주 중요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마음에 자리 잡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자네의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공화정 수호를 위해 나를 살해하는 거라면, 나의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로마라는 테두리 속에 있는 모든 인간의 행복 추구라고 밖에는 대답할 길이 없네. 자네들이 경애해 마지 않는 키케로도, 만약 그가 의무에 관한 책을 쓴다면 그 책의 ??의무??는 자네들의 비합법적 의무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야.
세상에 완벽한 정치 체제는 어디에도 없네. 새 질서도 어느새 기존 질서가 되고 다시 새 질서가 들어서고, 그것은 다시 기존 질서로 바뀌지. 모든 것은 순환하는 것이라네. 이 로마에도 언젠가 군주정이 오래 되면 새로운 정체가 출현하겠지. 하지만 지금은 군주정만이 로마에 맞는 옷이야. 로마는 몸이 커졌으니까.
나는 이제 3월 15일을 기다리겠네. 그리고 죽어 자네들이 주연이 될 블랙코미디를 감상하겠네. 내 안목과 자네들 안목의 대결인가? 흥미로울 것 같네. 그럼 이만 써야겠군. 발부스가 전했을 때 답장은 따로 필요 없네. 건투를 비네. 참, 세르빌리아한테도 안부 전해주기를.
로마력 709년, 3월.
친애하는 수도담당 법무관, 마르쿠스 브루투스에게,
카이사르가.

카이사르는, 몸젠의 말대로 창조적 천재다. 창조적 인물의, 창조자만의 고뇌는, 분명 그 시대에 혼자만의 것이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는 정신적으로 고독했을 것이다. 그에게는 그를 추종하는 사람은 있어도, 그의 정신을 이해하고 함께 고민했던 사람은 없었으니까. 물론, 이 편지는 브루투스를 막지 못했고, 그는 죽었다. 고독한 창조적 천재는, 빗나간 광기 속에 죽어 갔다. 천재를 죽이는 사람들의 모습은, 흡사 자신의 신념만을 고집하는 사람들의 편협함을 보는 것과 같다면, 그것은 내 과장일까. 그의 죽음 앞에 내 눈에 흐른 눈물은, 또 다른 영웅인 그라쿠스의 죽음을 보는 눈물이었고, 전태일의 분사(焚死)를 바라 볼 때의 눈물이었으며, 레온 트로츠키 암살을 바라 볼 때의 눈물과 같았고, 몽양 여운형의 최후를 바라 볼 때의 눈물이었다. 그 해묵은 권력 투쟁과 이념 투쟁의 희생양이 된 위대한 인물들의 최후를 보던 눈물이었다…….
신념이란 나쁜 것은 아니다. 단지, 어떤 신념을 가지고, 그 신념을 어떻게 세상에 적용하는지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질 뿐이다. 한국의 97년도 대선에서 김대중 당시 후보에 대해 ??비판적 지지??를 했던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당시 자신들의 이상과는 달랐지만, 그러함에도 자신들의 신념을 잠시 버리고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그것은, 신념의 실현을 위해 잠시 신념을 가슴 속에 묻어두는, 혹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과의 공존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브루투스의 신념은 역사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신념이었으며, 진정한 신념의 실현을 위하여 다른 이들의 신념, 다른 이들의 생각에 양보할 줄 모르는 속 좁은 신념이었다.
그에게 죽은 카이사르는 어떠했던가? 그는 그와 다른 신념을 가진 사람들, 키케로나 다른 여러 인사들의 신념을 존중해주었고, 그랬기에 그는 원로원을 없애지 않고 유지했으며, 공화정적인 색채를 없애지는 않았다. 타인들과 신념은 다를지언정, 애국심은 같았고, 카이사르는 그들의 신념과 애국심을 존중해 줄 줄 아는 신사였으니까. 한국의 30년 군사 독재, 좌도 모르고, 가운데도 모르고, 오로지 우만 아는, 다른 것은 생각지도 않고 오로지 경제적 실리와 권력욕에 찬 군사정권 시대의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었다. 이념, 신념의 대립과 갈등, 하나의 신념이 있으면 하나의 신념은 대역죄라는 생각에 찬 것과는 너무나 다르고도 멋있지 않은가!
나에겐 꿈이 있다. 수구가 보수가 되고, 급진이 진보가 되며, 이데올로기 갈등이 적어지고, 개방적이며 실용적인 사회로 변하는 꿈이…. 우리의 주적은 북한도, 일본도, 미국도, 그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아니다. 우리의 주적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폐쇄성과 허위 의식, 인색함, 아집. 폐쇄성과 아집이 영광의 고립 같은 것으로 미화되고 칭송받던 시대는 지났다. 폐쇄성은 우리에게 ??안정과 유지??라는 것으로 당장 우리의 살을 찌울 수는 있어도, 그로 인해 몸이 비대해진 우리는 국제사회의 레이스에서 서서히 낙오될 것이다. 로마는 새 질서를 세운 후 다시 살이 쪘을 때도 다이어트를 하지 않고 안정만을 생각해서 오도아케르에게 무너진 것이 아니던가? 하지만, 항시 열린 마음을 가진다면 어떨까? 개방적인 열린 자세, 실용적인 자세의 나라가 된다면…. 전쟁의 공포를 몸소 체험한 재향군인회 분들과 여러 기성세대들의 고충을 이해함과 동시에, 베트남전에서의 죄악을 인정하고, 진보와 보수가 대립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보완하며 서로의 신념을 인정하는, 화합하는 나라. 대한민국. 상상만 해도 자랑스럽고 흐뭇한 모습들의 나라. 나는 대한민국을 꿈꾼다. 그 꿈은, 나를 지탱해주는 신념이다.
또 다른 한 쪽에서도 나를 지탱해준다. 우리 사회와 정치에 관용이 싹트는 것에 대한 나의 꿈, 나의 신념이…. 무한 경쟁시대의 삭막한 사회에 일으킬 수 있는 조용한 혁명은, 바로 여유로운 관용이다. 관용은 여유를 낳고, 여유는 삭막함이 아닌 푸근함을 선사해주지 않을까. 보수와 진보, 수구와 급진의 극단적인 대립으로 상생의 정치를 뒤로 밀쳐놓기보다는, 상호보완해 나가고 서로가 서로를 관용으로 보듬는 정치를 한다면, 온 국민과 세계에, 월드컵과 같은 감동을 줄 수 있으리라. 그렇게 되면 우린 로마와 같은 존재가 될 것이다. 이미 우리는 월드컵에서 세계 속에 우뚝선 ??보편??이 되었다. 이제 로마와 같이 새롭게, 아시아의 ??특수??가 아닌, 새로운 아시아의 ??보편??으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꿈은 이루어지므로.
로마에는, 그리고 우리에게는, 뭔가 특별한 보편이 잠재해 있다. 개방성과 실용, 관용. 그리고 그 열린 마음 속에 잠재된, 어떠한 사상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한 포용력이 말이다. 우리나라에도, 로마처럼 그 것이 표면화되고 생활화되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란다. 그것은 지나간 카이사르의 꿈이다. 모든 사람의 열린 마음을 통한 행복을 바랬던 카이사르의 꿈. 그리고 로마인의 정신이며, 세계인의 정신이다. 나는 내 삶의 모든 현장에, 이 로마의 정신, 세계의 정신을 항상 가슴에 품고 있으리라 다짐한다. 그 정신이 모든 한국인의 정신이 된 이후까지도 영원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