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신과 머저리를 읽고 병신과 머저리

병신과 머저리
저자 : 이청준
출판사 : 열림원
병신과 머저리가 내 손에 잡히기까지 멀고도 먼 길을 지나왔다. 처음 내가 접했던 것은 사실 병신과 머저리가 아닌 삼대였다. 아무리 꽉꽉 눌러 잡아봐도 손안에 가득 들어오는 두께며, 들고 다니면서 읽기에 부담스러웠던 무게며, 거기다 나에게는 생소한 시대의 지식인들의 어려운 말들이 표지를 넘기는 것도 힘겹게 만들었다. 독서 편식이 좋지 않은 습관인 것은 알지만 부족한 나에게 삼대는 무리였던 것 같다. 병신과 머저리는 제목부터가 친근했고 바보들의 행동을 통한 해학과 풍자의 내용이라 지레 짐작하고 잔뜩 기대하고 있었다. 병신이 무엇이고 머저리가 무엇이지도 모르면서 말이다. 사실 난 지금도 그 둘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병신은 몸이 불구라던가 신체적인 이상이 있는 것이고 머저리는 바보와 같은 종류일 것이라고 추측할 뿐이다.
병신과 머저리는 단어나 말이…(생략)

. 김일병은 그리 강해보이지는 않지만 굴하지 않는 눈을 가졌다. 형은 김일병에게 꽤나 깊은 인상을 받았고 관모에 관해서는 부정적이었다. 전쟁이 터지고 김일병, 관모 , 형 이렇게 3명이 패잔병이 되어 동굴에 숨어지내게 되었다. 김일병은 팔이 잘려나가 썩어 들어가고 있었고 변태인 관모는 형에게 자꾸만 찝쩍되었다. 그리고 입을 줄이자며 김일병을 죽이자고 했다. 여기쯤에서 형의 이야기가 잠시 끊겼다. 동생은 빨리 마무리 짓고 싶어 안달했고 결국에는 형이 김일병을 죽이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그러나 나중에 형이 낸 결말은 달랐다.관모가 김일병을 죽이고 형이 관모를 죽였다. 이 두 형제가 맺은 서로 다른 결말을 통해서 나는 형과 동생을 비교할 수가 있었다. 동생은 복잡하고 힘든 일이 다가오면 회피해 버리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았다. 동생은 형을 겁쟁이라고 했지만 동생이야말로 겁쟁이었다. 형이 내린 결말은 적어도 동생보다 용기 있었으며 끝까지 그 일을 책임지려는 노력을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동생과 형 둘 다 어째서 김일병을 데리고 도망치려는 시도는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관모를 죽일 수 있는 용기가 있었다면 김일병을 데리고 도망칠 수도 있었으리라 생각했다. 나는 김일병의 눈에서 파란빛을 봤다는 형의 묘사를 보고 김일병이 굳세고 강한 의지를 지닌 사람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김일병은 마지막까지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아니 `싫다`는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 같았다. 김일병은 팔이 잘려 죽어가는 그저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는 작가가 김일병을 통해 무엇인가를 말하고 싶어한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내가 느끼지 못하는 무엇인가를 말이다. 동생은 끝까지 혜인의 결혼식에 참가하지 않았고 마음대로 형의 결말을 낸 다음날 혜인에게 편지를 받았다. 혜인의 편지는 내가 이 복잡한 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혜인의 말에 따르면 형과 동생은 둘 다 환부를 가지고 있는데 형은 그 환부를 알고 스스로 치료하고 있으며 동생은 그 환부가 어디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환부는 형보다 증상이 더 심하며 동생 자신의 힘으로 치료해야 한다고 했다. 형의 변화로 인해 흔들리고 있는 동생에게 혜인의 편지는 생각을 정리하고 자신을 되돌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것 같다. 형은 다시 병원에 나가 일을 한다. 그리고 혜인의 결혼식장에 참석하고 거기서 관모를 보고 돌아와 소설을 태우면서 동생에게 병신, 머저리라 소리지른다. 동생은 방으로 돌아와 혜인의 말을 되새기며 자신의 환부에 대해 생각해본다. 사랑하는 여인도 말없이 떠나보내고, 그렇다고 슬퍼하는 것 같지도 않고, 소극적이고, 문제를 해결할 만한 용기도 없어보이는 동생이 바로 머저리였다. 그리고 자신의 환부를 뚜렷하게 알고 소설을 써서 스스로 관모를 죽임으로써 고통을 극복한 형은 병신이었다.
나는 지금 이렇게 무기력한 동생을 비판하지만 사실 동생의 환부가 어디에 있는지 짐작도 못하고 있다. 동생에게는 혜인과 헤어진 것 이외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다 동생의 환부는 혜인을 만나기 전부터 있었던 것 같다. 그렇다면 동생은 무엇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일까? 책은 끝이 났는데 나는 아직도 많은 것을 모르고 있다. 동생도, 형도, 김일병, 관모도 모르겠다. 그들이 말한 것과 보여준 행동들은 수수께끼 투성이다. 다만 동생과 내가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동생이 형의 변화를 보고 반성하기 시작했다는 것에 안도했다. 지금은 모르지만 언젠가는 환부를 알게 될 수도 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주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형처럼 환부를 극복하고 현실에 안주할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