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포가는길 삼포가는길

고등학교에 와서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책과는 담을 쌓고 살던 나는 작문 숙제로 이 글을 읽게 되었다. 책의 첫머리부터 시작되는 작가의 함축적인 문체가 나에게는 다소 무겁게 느껴졌으나 곧 나도 모르게 이야기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되었다.
정처 없는 떠돌이 노동자 영달은 밥값을 떼어먹고 도망쳐 나와 어디로 갈까 망설이다가 정씨를 만나 동행이 된다. 정씨는 교도소에서 기술을 배우고 나와 영달이처럼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는 노동자인데, 그는 영달이와는 달리 고향인 삼포로 향하는 길이다. 이들은 감천으로 행선지를 바꾸어 가던 중에 군부대를 돌아다니며 산전수전 다 겪은 술집 작부 백화를 만난다. 그들은 서로의 신세가 측은히 느껴져 동행이 된다. 가족도 없이 밑바닥 인생을 살아 온 세 사람의 이야기. 그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앞으로 어떤 일들이 벌어질지... 매우 궁금했다. 그들은 세상의 온갖 궂은일을 다 겪었음에도 불구하고…(생략)

지로 연결된 삼포는 그가 떠나고자 했던 도시와 전혀 다를 바가 없는 공간으로 전락해 버렸다. 삼포는 그에게 있어 오랜 부랑 생활을 끝내고 안주할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잃었다. 그는 이 소식을 듣기 전까지 얼마나 많은 기대를 했을까? 이제는 정말 다시 시작해 보겠다고, 정말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결심했을 테고,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유일한 정신적 고향인 삼포를 기억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씨는 순간 영달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되고 만다. 이 부분에서 나는 마치 내가 정씨가 된 듯, 가슴이 턱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이 이야기를 시작하면서부터 줄곧 삼포에서의 정씨의 행복한 삶을 기대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맨 마지막의 "기차가 눈발이 날리는 어두운 들판을 향해서 달려갔다." 라는 문장은 정말 인상적이었다. 앞으로의 세 사람의 삶도 눈발을 날리는 거리를 걷듯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을 것이라는 암시를 주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마음 한 곳이 계속 불편했다. 그 뒤 일주일이 지나도록 나는 이 마지막 문장을 잊을 수가 없었다. 짧은 소설에서 이토록 많은 감동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가시고기나 등대지기 등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비극적으로 죽을 때 보다 오히려 더 슬펐다. 아마도 소설 속의 상황이 지나치게 필연적으로 꾸며졌다거나, 등장인물이 위대한 사람이나 공주처럼 과장되었다거나 하지 않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할만한 이야기여서 더 친근하고 생생하게 느껴졌나 보다. 이 소설은 우리나라에 한창 산업화의 물결이 급속히 진행된 1970년대에 발표되었다고 한다. 그 당시에도 정씨처럼 고향에 대한 그리움 속에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뜨내기 인생이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언젠가 국어 시간에 배운 소설이 시대를 반영한다는 말이 떠올랐다.
독서는 많은 것을 살찌운다. 나는 요 며칠 사이에 평생 경험하지 못 할 수도 있을 삶을 여러 폭으로 느꼈다. 이제 더 많은 사람들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는 아량도 넓어진 만큼, 벌써 내 생각의 두께도 저만큼 두터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