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가락에 잘못 떨어진 먹물 한방울을 읽고나서 손가락에떨어진

손가락에 떨어진 먹물 한방울을 읽고나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랑`은 문학의 주요 주제였다. 특히 남녀의 사랑은 애틋함과 짜릿함으로 시대를 초월하여 시선을 끄는 영원한 주제다. 진한 여운을 남기는 사랑은 대부분이 비극적인 사랑이다.
소설이라는 장르가 이 땅에 생긴 역사가 길지 않은 까닭에, 우리나라엔 봉건사회에서 실제로 있었을 법한 사랑의 비극을 소설로 다룬 작품이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실제의 삶에서는 신분이나 직업에 의해 파국을 맞이했던 사랑이 많았을 것이며, 특히 조선시대엔 유교라는 봉건적 이데올로기로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을 사슬처럼 옥죄었던 만큼 애달픈 사연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듯 귀한 사연을 소설 운영전에서 문구멍으로 훔쳐 보듯 만날 수 있었다. 춘향전이나 심청전 등 판소리나 창극으로 만들어진 전근대 소설은 낯이 익지만, 운영전은 우리에게 생소하다. 전국국어교사모임의 대안 교과…(생략)

는 여인들이다. 조선 왕조 오백년동안 필사적으로 왕의 사랑을 얻고자 온몸을 던진 궁녀들의 이야기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소설의 소재는 흔치 않다. 왕실에 철저히 매인 궁녀인만큼 그들의 사랑은 시작부터 비극적인 결말이 미리 보인다. 소설의 여주인공은 안평대군이 개인적으로 글과 문장을 가르쳐 따로 둔 궁녀 열 사람 중 한 사람이었다.
`사랑엔 국경이 없다`는 말처럼 남녀간의 사랑은 한 번 불이 붙었다 하면 스스로 잦아들기 전엔 누구도 그 불을 끌 수 없는 강한 견인력을 가진 사례를 동서고금의 숱한 민담과 전설을 통해 볼 수 있다. 더욱이 다른 이에 대한 접촉과 사랑이 금지된 궁녀에게 불붙은 사랑은 무쇠도 녹일 만큼 뜨거웠을 것이다. 청초한 두 남녀의 사랑은 마치 스스로를 사르는 촛불 같았다. 안타까움과 애틋함은 보는 이의 애간장을 녹이는 듯 했다. 결국 두 남녀는 봉건적인 질곡을 넘지 못한 채 세상을 뜨고 만다.
소설 `운영전`의 아름다움은 두 남녀에 그치는 게 아니다. `자란`을 비롯한 아홉 명의 궁녀들이 운영의 사랑을 돕기 위해 수호천사처럼 움직인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화도 풀잎의 아침 이슬처럼 청아하고 난꽃처럼 향기롭다. 그들은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운영의 사랑을 돕고, 운영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던지려 한다. 친구의 애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친구를 배신하는 일이 버젓이 저질러지는 요즘 세태에 이들의 우정은 보석처럼 빛난다.
이렇듯 아름답고 절절한 사랑과 우정이야기를 통해 메마른 가슴이 촉촉해지길 빈다. 한시를 번역해 놓은 것이긴 하지만 옛시의 고즈넉한 아름다움도 만끽할 수 있다. 어린 시절 보았던 그림책을 다시 손에 든 것처럼 책 전면을 드리운 달빛처럼 은은한 삽화도 보는 즐거움을 더해 줄 것이다. 무엇보다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을 옭죄서 생명을 소진시키는 반생명적인 이념과 질서가 지금 이 땅에는 사라졌을까를 한번 반성해 보는 것도 이 소설의 의미를 깊게 해 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