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상의 눈물을 읽고 곧은소리를 내는 사람

이 책은 왠지 우리 이야기가 등장한 듯 해서 반가웠다.
더구나 요즘들어 더욱 심각해진 학교 폭력 문제를 다루고 있어 실감나게 우리 교육 현장을 드러낸 듯 싶기도 하다.
형우가 반장을 맡고 난후부터, 어느 고등학교 2학년 교실에 작은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기표의 포악스러움에도 형우에게는 예외인 듯 했다.
기표는 폭력으로 이미 그들의 세계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학년이 되고 담임이 바뀌면서, 더구나 의리와 선량함으로 뭉쳐진 형우가 반장이 되면서부터 기표의 영향력이 점점 약화되었다. 담임이 내건 자율과 의리는 급우들을 무한한 감동으로 몰아넣어 갔다. 기표의 자존심을 건드리게 된 형우는 기표에게 린치를 당하게 되었지만 그는 끝내 기표를 감싼다. 더구나 담임과 형우는 기표 집안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밝힘으로써 기표를 동정의 대상으로 만들어 버린다. 급우들은 기표를 위해 모금운동까지 벌…(생략)

신으로 덧씌워진다. 일종의 파워 게임에 불과했던 이들의 행위가 순식간에 고매한 정신을 띠게 된 셈이다.
이데올로기는 이렇게 내부의 진실을 은폐하는 힘이 강하다.

기표가 의지하고 있던 폭력은, 그 힘보다 더 큰 보이지 않은 실체 앞에서 무력화된다.
결국 그는 한 집단의 이데올로기를 통해 무너지고 만다. 그러나 기표는 단순히 자기 힘이 없어졌다고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그는 한 인간의 우정을 가장한 비정함을, 자상함을 가장한 냉혹함을 본능적으로 느낀 것이다.

공통의 이데올로기를 갖는 집단에겐 자유나 자율이 주어져도 그것은 대단한 구속력을 갖게 된다. 그래서 이데올로기는 사회 성원들에게 공통의 가치나 목표를 부여하는 일이 가능하게 된다. 기표의 담임은 반 학생들에게 자율과 우리 모두를 위해서 라는 이데올로기를 심어주었다. 이렇게 사회가 유지되는 원리가 되다시피한 법과 이데올로기가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면, 혹은 누군가에 의해서 교묘히 조작되고 있다면 그 사회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담임과 형우는 자율과 우리를 내세우고 기표는 폭력을 내세우고 있지만 이들의 목표는 동일하다.

“권력을 누가 잡느냐.“

폭력에 의거한 권력은 응당 오래 버티지 못한다. 누가 보아도 정당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우리가 배워왔던 신념에 위배된다.
문제는 담임과 형우가 내세운 이데올로기이다. 그들의 이데올로기는 목표가 아닌 수단이었다. 그들의 목표는 기표의 세력제거를 통한 학급장악에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철저히 실체를 숨기고 있는 것이다. 급우들은 담임이 내세운 자율과 우리라는 이념속에 구속당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빨려들어 갔다.

이처럼 이데올로기는 그것을 창출한 자에게는 권력을 유지하는 하나의 수단이 되는 것이지만, 그 이데올로기의 지배를 받는 자들에게는 하나의 절대적 진리가 되어버린다.

나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떠올렸다.
우리는 통치자의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지며 법이 권력자에게 굴종하는 시대를 살아왔다.
이 사회는 권력이 휘두르는 횡포에 뒤뚱거려야 했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교묘한 이데올로기에 그 이면을 보지 못한채 휩쓸려 가기도 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나’같은 부류의 사람들은 그 부당함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목청껏 외칠수 있을 만큼의 용기도 없고, 사회를 바로잡아 가겠다는 의지를 곧추세우고 실행에 옮기지도 못하는 그런 소시민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느꼇던 분노를 책을 덮는 순간 제법 잊어버리고 살게 될는지도 모른다. 또 형우네 친구들이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 내세우는 그럴듯한 구호를 무조건 따라가게 될는지도 모르지.

그러나, 사회는 한사람의 권력자가 만들어 가는 것이 아니다.
그가 아무리 허울 좋은 법과 이데올로기로 자신의 위선을 포장할지라도 그 허구를 읽어내는 사람들이 있다. 그 허구를 읽어 낼 뿐 만 아니라 그 껍데기를 벗기고 이 땅의 정의를 위하여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다. 비정상적인 권력을 방관하여 결국 그들을 돕는 결과를 낳는것도 우리네 사람들이지만, 폭력과 비리의 모순으로 얼룩진 사회를 바로잡는 것도 우리네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소리를 부른다.’
김수영의 시 <폭포>의 한구절이다.
이 땅은 곧은 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곧은 소리를 불러모아 함께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는 이 땅의 곧은 소리를 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부끄럽지 않은, 이 책에 등장하는 ‘나’같은 부류의 인간이나, 담임이나 형우같은 부류의 인간이나, 기표같은 부류의 인간이 아닌, 곧은소리를 내는 사람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