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를 읽고 유예

오상원의 유예를 읽고
이 작품은 6.25 전쟁에 참여한 소대장이 소대원 모두를 잃고 결국엔 포로가 되어 처형당하는 내용을 그려냈다. 이 책의 제목이자 겉으로는 뚜렷이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그러나 매우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는 `유예` 라는 단어는 표면상 `움 속에 갇혀 처형당하기 전까지 짧은 시간` 이라는 뜻을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 것은 어디까지나 독자들이 책 내용과 연관지어 가장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뜻 일뿐이다. `유예` 라는 단어를 우리 인간 사회와 연관짓자면 무한한 의미가 쏟아져 나오게 된다. 이 책의 저자는 `유예` 라는 단어의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6.25 전쟁을 인용한 것뿐이다.
이 책에서 내가 마음속 깊이 느낄 수 있었던 것이 몇 가지 있었다.
우선, 이젠 산 속에서 얼마나 더 헤메야 할지도 모르는, 모든 소대원을 비롯한 선임하사까지 죽은 현실에서 초인간적인 능력을 발휘하는 소대장의 …(생략)

손꼽히는 나라가 스웨덴이다. 하지만 이 나라 국민의 자살률도 세계1위라 한다. 어른들은 자주 입버릇처럼 얘기하시곤 한다. 옛날에는 불편했지만 행복했었고 오늘날에는 편리하지만 불행해졌다고. 사람들은 편리함 속에 진짜 고생다운 고생 그 때문에 인생이 더 값지고 살만하다는 현실을 잊어가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그러기에 조그마한 불행과 시련 속에서도 좌절하고 위안을 받고자 자살사이트 또는 그 밖의 향락적인 것들을 이용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오상원의 "유예"는 그리고 그 속의 주인공인 소대장은 자신의 경험담을 통해 오늘날의 나약한 사람들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내 맘에 와 닿았던 것은 선임하사가 마지막으로 죽기 전에 남긴 말이다.
"사람은 서로 죽이게끔 마련이오. 역사란 인간이 인간을 학살해온 기록이니까요. 그렇게 생각지 않으시오? 난 전투가 제일 재미있소. 전투가 일어나면 호흡이 벅차고 내가 겨눈 총구에 적의 심장이 아른거릴 때마다 나는 희열을 느낍니다. 그 순간 역사가 조작되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지거든요. 사람이란 별게 아니라 곧 싸우는 것을 의미하고 싸우다 쓰러지는 것을 의미한 겝니다."
대로를 건너 산에서 산으로 넘어 가던 중 적의 총격에 당해 소대원이 모두 쓰러지고 선임하사마저도 부상을 입어 간신히 소대장이 업고 산 속으로 피신했다가 결국은 선임하사가 죽음에 이르게 되는 장면에서 한 말이다. 인간은 정말 서로를 때리고 죽이고 하도록 만들어진 것일까? 서로를 죽이고 욕해야 희열을 느끼는 것일까? 이 세상에는 분명히 "사랑" 이란 것이 존재하고 그것은 인류가 세상에서 멸종하는 날까지 함께 하는 것이다. 순자의 성악설처럼 사람이 본래 악하다면 어찌하여 사랑이란 것이 존재하게 되었을까? 그렇다면 서로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한낱 후천적으로 인간이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노력에 불과한 것일까? 이 부분이 내가 이 소설에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부분이다. 그렇다고 맹자의 성선설을 지지하는 바도 아니다. 그저 인간은 악하지도 선하지도 않은 중립적인 위치에서 태어나 주위환경과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인격을 형성해 간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좀더 근본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면 악하고 선하다는 기준도 구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사회적 그리고 시대적 상황에 따라 개인 하나 하나의 주관적인 판단이지 인류전체를 통 털어서 누구는 선, 누구는 악으로 구분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이란 별게 아니라 곧 싸우다 죽는 것을 의미하고 싸우다 쓰러지는 것을 의미한 겝니다.` 나에게 이런 문장은 이 세상에 절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 깊은 의미는 잘 파악이 안되지만 나의 내면세계에 심오한 전율을 느끼게 해 주었던 부분이다. 이 소설의 처음과 끝에 서로 대칭을 이루듯이 놓여있는 나(소대장)의 죽음을 기다리는 부분이다. 자꾸만 희미해져 가는 정신에서도 나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굳은 의지, 그리고 그 밖에는 왜 죽어야하는지 나의 죽음이 무슨 의미가 있는 지도 모른 채 끌려가는 자신의 실존.
"싸우다 끝내는 죽는 것, 그것뿐이다. 그 이외는 아무것도 없다. 무엇을 위한다는 것, 무엇을 얻기 위한다는 것, 그것도 아니다. 인간이 태어난 본연의 그대로 싸우다 죽는 것, 그것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모든 것들이 인류라는 크나큰 공동체 안에서 보잘 것 없는 필자의 존재를 인식하게 했다. 정말 인생이란 저런 것일까? 아무런 목표도 없이 그저 싸우다 죽는 것, 오직 이것 하나 뿐일까? 왜 사는지 왜 죽는지 아무것도 모른 채 사는 일생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나는 비록 소설에 담긴 크나큰 의미에는 너무나 작은 비유지만 소설에 표현된 인생을 나는 내 자신에 비유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을 읽게 된 동기가 오히려 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언급했었다. 그렇게 느낄 수 있었던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왜 읽어야 하고 왜 독후감을 작성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정독을 하는 것은 마치 소대장이 왜 죽는지도 모른 채 앞을 향해 걸어가는 것과 같다고 느낀 것이다.
유예! 시사적인 단어로서 많이 접해 봤지만 이 단어의 속뜻을 절실히 느끼도록 해 놓은 이 소설은 여러 면에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중간에 시점이 바뀌는 부분이 있어서 다소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그런 형식적인 것들이 나의 내면 세계에 속속 파고드는 파동에 영향을 미칠 순 없었다. 고난을 헤쳐나가는 강인함,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 인생의 허무함과 또 한편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해준 이 소설은 이제 인생을 시작하는 내 앞길의 길라잡이가 되어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