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직의 `혈의 누`를 읽고 작품평 이인직

이인직의 ‘혈의 누’를 읽고
이인직의 ??혈의 누??는 최초의 신소설이라 일컬어지는 작품인데 구성력과 성격 묘사에서 고대 소설의 전형적인 특징에서 고소설의 그늘을 벗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청나라에 대한 증오와 일본에 대한 무비판적인 옹호, 구 정치인에 대한 무조건적인 비판 등이 한계로 지적되고 있는 작품이다. 또한 고대소설과 근대적 특성을 이어주는 교량역할을 담당하는 작품이란 점에서 근대적 특성과 전 근대적인 특성이 나란히 공존하고 있는 이중구조가 작품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문체의 경우만 해도 고대소설과 다르기는 하나 이광수의 객관적 문체와도 다른 약간은 어중간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작품의 대략적인 줄거리는 말하자면 평양의 김관일 가족은 청일 전쟁으로 인하여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김관일의 부인 최씨는 딸을 찾아 허둥대다가 봉변을 당할 뻔하다가 때마침 나타난 일본헌병에게 끌려 가게 …(생략)

게 알리면서 소설은 끝나게 된다.

이 소설에서 중요하게 볼 것은 서두부분에서 ??청일전쟁??을 ??일청전쟁??이라 부르는 것인데 이인직은 소설 내내 일본군을 옹호하고 청나라 군사를 노골적으로 비난한다. 옥련을 도와준 일본인을 지극히 선량한 인물로 묘사함으로써 일본인의 이면에 내재된 침략적 속성을 간과하게 만들고 있으며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소설전체에서 수용하고자 하는 근대적 문물을 일본을 통한 문물로 인식하게 만들며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식은 곧 이인직의 친일을 정당화하는 논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자칫 무비판적으로 수용할 경우 의병전쟁을 ??비적??으로 묘사하는 식의 비 민족적 관점을 이식할 우려가 있다.

이와 함께 주목할 것은 주인공 김옥련과 구관서등의 일본 유학이나. 그들이 내세운 신교육사상 문명개화 사상의 표현 작가가 자주 나서서 탐관오리를 매도하는 것 등이 있는데 이러한 친일적 사상, 구 정치인에 대한 혐오, 신교육에 대한 긍정적 사상은 이인직이 당시 한국의 현실을 가장 실리적으로 파악한 탓이다. 그는 마흔 살까지 벼슬을 못한 미미한 계층 출신이었고 따라서 구 정치인에 대한 증오를 많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인물 이였다. 일본을 청나라 보다 우월하게 묘사한 것 도 같은 맥락이라 생각되는데 계층적 뿌리가 약해 권력층에 설 수 없었던 고로 어느 쪽에 기대는 것이 현실적인가 하는 것을 편견 없이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작품에서 그는 옥련과 구완서의 입을 통하여 신교육으로 개화하여 중국뿐아니라 세계로 나아가는 식의 말을 하는데 그것은 다시 우리나라의 실정으로는 불가능한 이야기 이다. 또한 작가가 이것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인데 불구하고 그런 말을 했던 것은 은연중에 일본의 속셈을 드러낸 것이 아닐까 한다. 즉 옥련의 입을 통하여 일본이 우리나라를 지배하여야 하는 정당성이랄까 당위성 같은 것을 주장하고 세뇌시키려 하였던 것이다.

작품이 발표된 1906년은 한일합병직전이다. 그러나 이시기는 이미 일본의 실질적인 침략이 가속화되고 있는 상황이며 이인직의 정치적 행로와 마찬가지로 작품 역시 노골적인 친일의 경향을 띄게 된다. 작품의 출발이 되고 있는 배경도 청일 전쟁이며 비극을 발생시킨 원인이 청나라에 있다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일본인의 도움을 받는다는 것 역시 근대화를 일본의 힘을 빌려 이루어야 한다는 인식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문제가 많다.

이러한 기본 골격을 갖춘 혈의 누는 주인공의 여행길을 따라가는 식으로 진행되어 가는데 이러한 것을 통해 혈의 누가 드러내고자 하는 주제는 분명하다. 근대화만이 조선사회가 나아갈 유일한 길이고, 그것을 위해서는 신교육아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목할 만한 점은 이 여로가 외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되는 수동적인 성격으로 주어진다는 점이다. 일청전쟁, 일본인 군의, 구완서의 개입 등에 이끌려 그녀의 여로는 조선-일본-미국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와 같은 수동성은 현실에 대한 반성적 탐구와 작가가 제시하고자 한 새로운 이면에 대한 검토가 전적으로 결여되어 있음을 반영한다.

당시의 한국 현실에 대한 무조건적인 부정과 새로운 이면에 대한 무조건적인 긍정이란 극단적인 관점으로 말미암아 옥련의 여로가 일본, 미국으로 진전되는 이유에 대한 점검이 배제되고 있으며 일본과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구문명을 근대의 절대적인 모습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근대화는 옥련이 고아의 상태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음에서 더욱 심각한 문제를 드러낸다.
부모와 헤어져 이국인 가정에서 자라난 옥련은 백지 상태에 놓인 자유인임과 동시에 한국사회의 구체적 현실과는 어떠한 관계도 없는 무비판적인 수용의 상태에 놓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인직은 새로운 이념의 절대적 정당성에 대한 확신에서 출발하고 있으므로 주장하고 부여주기만 하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을 확고히 할 내용이 빈약할 때 다른 흥미를 추구하기 위해 고대소설에 나올법한 계모의 학대 등 전통적인 측면들이 개입하게 되는 것이다.

형식상의 과도성도 이 소설의 특징 중 하나인데 옥련의 이름에 얽힌 이야기와 옥련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는 독백, 일본인 계모의 학대 등이 그것이다. 이름의 내력을 제시하는 부분에서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것은 마치 심청전을 보는 듯 인물이 지나치게 전형적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고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성이며 더욱이 옥련이 일곱 살임에도 불고하고 비현실적으로 의연하게 대처하는 것도 고소설의 특징이다. 특히 인물의 독백은 고소설에서 보이는 율격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영탄에 가까운 종결어미도 판소리계 소설의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고소설의 흔적이 여기저기에서 보이는 것은 작가의 의식이 완전히 근대적 자각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점들에도 불구하고 이인직의 혈의 누는 구성력과 성격묘사에서 고대소설의 전형적인 특성에서 벗어났으며 최초의 신소설이란 문학사적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