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 눈길을 읽고나서 눈길

설이나 추석 같은 큰 명절을 생각하게 되면 으레 같이 떠오르게 되는 것은 다름 아닌 고향이다. 고향을 그리며 달려가는 그 가족의 설레임, 기대감... 고속도로에서 오랜만의 가족들 만남에 피곤함과 지친 기색들도 없는 아버지들, 명절 중후군이란 신 언어를 만들어 낼 정도로 일을 하시는 어머니들, 놀 생각에 신이 난 아이들.. 이 모두들 고향이 있으므로 써 볼 수 있는 모습들이다. 하지만 이런 사람들 와중에도 고향이 없어 또는 갈 수 없는 곳이라서 못 가는 수도 있다. 그렇다고 고향을 못 가서 서운해 할 필요는 없다. 지친 심신을 달랠 곳이 가정이라면 언제나 위로를 받고 우리들 정신의 요람은 바로 고향이니. 비록 태어난 곳은 아니지만 편안함을 느낀다면 병든 몸과 마음 얼마든지 치유할 수 있는 곳이라면 그곳이 바로 고향이 아니겠느냐고 감히 말하고 싶다.
‘귀향연습’에서 그러했듯이 말이다. 훈이라는 아이와 지섭이는 고향을 떠나…(생략)

것처럼 그리 원만한 관계는 아니란 걸 알 수 있지만, 지붕개량 사업을 조금씩 귀띔을 해오는 노인이 그리 밉지 않을 수가 없다며 다시 한번 노인과 자신 사이의 빚이 없다는 걸 단정 짓는다. 아무리 모자 지간에 주고받은 게 없다지만 이렇게 무례하게 구는 자식은 정말 처음 본다. 그리고 그 좁은 단칸방에 들어앉은 올케는 나를 정말, 조마조마하게 하는 상징물이다. 어디서든 묵은 빚 문서 하나가 불쑥 튀어나올 것 같기 때문에... 그 모습에 안타까워하던 아내는 노인에 대한 남편의 빚을 들추기 위해 노인으로부터 옛 일을 상기시키게 한다. 하지만 노인은 선뜻 그이야기를 꺼내려 하지 않는다. 나도 물론 그 묵은 빚 같은 옛 얘기가 다시 나오는 것은 싫다. 그리고 술을 마셔 취한 남편이 잠을 자고 있는 사이 노인의 아들에 대한 정성어린 사랑이야기가 아내의 눈을 적셔 준다. 하지만 이것을 못 들었을 내가 아니었으며, 내 눈에는 무언가 뜨거운 것이 앞을 가렸다. 옛 일에 대한 진정한 노인의 사랑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내 코끝까지 찡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세상 모든 일을 모르는 것이다. 더군다나 지극한 어머니의 정성어린 마음은, 언제나 밖에 나간 내 자식 걱정뿐이다.
해변아리랑에서처럼 반백 리 길이나 걸어가 딸아이를 걱정하는, 어떻게 해서라도 시집잘 못 가 병을 얻어 죽어가던 딸아이를 곁에 두고 싶어하던 그 어머니의 행동 하나 하나에 나로 하여금 가슴 뭉클 히 만들고, 그 추운 눈길을 걸어 아들을 배웅해 잠시라도 아들 곁에 있고 싶어하던 그 눈길에서의 어머니처럼, 그리고 새가 운들에서 오랜만에 귀향길 에 올라온 아들을 위해 팔려버린 집을 꼭 예전의 집처럼 대해주시는 어머니처럼... 그런데 겉으로 표현되지 않는 어머니의 사랑을 알지도 못 한채 집을 나갔던 자식의 이야기는 나로 하여금 정의감을 불타오르게 했다. 하지만 결국엔 모두다 어머니의 땅 고향으로 되돌아온다.
‘빗 새이야기’에서처럼 집나가 30년이 지나 돌아온 아들을 어머니는 그의 지친 심신과 고난으로 뒤덮힌 그의 육신을 편히 쉬게 해준다. 마치 비가 올 때 비 피할 곳이 없는 빗 새를 위해 어머니께서 심으신 동백꽃처럼 말이다. 그리고 때론 직접 동백꽃이 되어 주시기도 하신다.
아니면 한 가족이 모두 산밭의 무덤 가에 나란히 묻히던지 말이다. 이처럼 세상 아무리 좋다한들 고향만큼 정겹고 마음 편한 곳이 어디에 있으랴. 하고 다시 한번 가슴 깊은 곳에 고향의 풍요를 그 향기를 새기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