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태일 평전 전태일 평전을 읽고

전태일 평전을 읽고
몇일전 책을 읽었다. 정말이지 책을 읽을 때 만큼은, 글을 쓰고 있을 때 만큼은, 나 자신… 정말 진지해지려 노력한다. 돌덩이보다 무거운 볼펜을 들고, 낙서할때만 사용하던 연습장을 펼쳐놓고 책을 읽는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글을 쓰기에 앞서 나의 모습을 이리도 장황히 설명한 까닭은, 내가 어떤 자세로 책을 읽었는가 반성해봄과 동시에 이제부터 내가 써나갈 글에 대한 어떤 분위기를 형성시켜 보고자 함이다. 이 시간 이후 나는 분위기에 젖어들게 된다. 젖어들수록, 빠져들수록 그만큼 나는 느낌이 흩어지지 않은, 감정이 비껴나가지 않은 충실한 글을 쓸수 있게 되는 것이다.
불쌍한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으로서 물질적 빈곤을 포함시킬수 있다면 그는 분명 불쌍한 사람이었다. 거기에 지식적 빈곤까지 포함시킬 수 있다면 그는 더더욱 불쌍한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불쌍한 사람이라 생각지…(생략)

의 서울, 그 현실이 얼마나 차고 매서운줄을 모르는 그가 아니었는데도 그는 용감하게 집을 떠났다. 과감한 가출을 한 것이다. 안타까운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불쌍한 어머니와 서글픈 여동생 둘을 남기고…
1년반 남짓한 고등공민학교의 생활이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었다고 토로했을 정도로 배움을 향한 그의 열정은 정말 대단했다. "하루하루가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살아있는 인간임을 진심으로 감사했습니다"라고 말했던 그가 배움에의 꿈이 꺾였을 때 심정이 어떠했을까. 배움을 평생의 소원으로 삼았던 그를 기억하며 나는 잠시 숙연해진다.
전태일의 유년기를 읽고 있을 동안에는 또다른 세상을 보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 세상은 밝은 희망의 세상이 아닌, 동굴같은… 어두침침한 암흑의 세상이었다. 빛이 보이지 않는, 그야말로 암흑인 세상에서 살고 있던 전태일… 책 속의 사진 몇장에서 전태일은 맨발을 벗고 있다. 그는 고통을 벗고, 어디론가 마구 달려가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발을 감싸고 있는 신발조차 자신을 옥죄이는 사슬처럼 느꼈던 것일까? 그것마저도 그에게는 구속이 되었나보다. 신발을 벗어두고 멀리 달아나 버렸으면 좋았을 것을… 설사 달아난다 하더라도 갈곳이 없었던 그였기에, 받아줄 누군가가 없었던 그였기에 그는 달아나지 못했던 것 같다.
이 책을 읽는 시종일관 내가 외친 단 한마디는 "부당하다"였다. 이 한마디는 어떤 한 장의 사진을 보고 튀어나온 것이다. 8살 남짓한 어린 소녀의 사진을 보고 말이다. 그 작은 체구의 소녀가 한창 뛰어놀며 맑게 자라날 나이에 어두침침한 다락방에서 실밥을 뜯고 옷가지를 나른다는 것이다. 세상에… 이럴수는 없다. 나는 한동안 말을 잊은채 마음속으로 "부당하다"는 말만 되뇌이고 있었다. 내가 살고 있는 이 땅덩어리 어느곳에서 부당하고 어이없는 대우를 받고 하루하루를 연명해 나가는 어느 생명들에게 해줄말 따위는 내 가증스러운 입술을 열어 감히 전할 수 없었다.
왜 우리는 똑같은 인간임에도 다른 인생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 나는 오열을 터뜨린다. 어이없을만큼 불공평한 세상을 향하여 마구 욕설을 퍼붓고 싶어진다. 어쩔수 없이 나는 또… 우리의 삶이 모순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만다.
태일은 생전에 자신의 이야기를 수기로 남기기도 했다. 어째서 그는 부끄러운 자신의 삶을 수기로 남겼던 것일까? 누가 강제로 시킨일도 아닌데, 그는 왜… 어째서 자신의 비극의 생들을 세세히 기록한 것인가. `부한 환경`의 사람들을 탓하려고? 아닐것이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회상하기 위함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타인으로 하여금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함도 아니다. 그는 자존심이 센 사람이므로… 어린시절, 아버지의 친구에게 밥 한끼 얻어먹는 것 조차 자존심 상해했던 그가 동정받기를 원했을리는 없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그는 더 이상 이 세상에 헐벗고 굶주리는 사람이 난무하지 않기를 바란 것이다. 그의 수기는 분명 비극적인 내용이지만, 이것은 흔히 볼 수 있는 비극소설이 아니다. 정말 존재하는 현실 속의 삶인 것이다.
한동안 나의 관심사는 무엇이었나. 나는 왜 어둡고 피폐된 자리에는 한 번도 눈길을 주지 못했던가. 그 좁은곳에 눈길을 줄 여유가 없을만큼 내게 시간이 부족했던가. 내가 모르고 살아왔던 또다른 세상… 나는 오늘에와서 새삼 세상이 너무도 넓다는 사실을 실감한다.
우리는 모르고 있다. 아니 알지만 잊고 있다. 어쩌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시선밖에 흔히 밑바닥 인생이라 불리는 안타까운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를, 그 사실을… 우리는 잊고 사는 것이다.
상처입은 자들의 진실과, 아픈 그들의 폐부 깊숙히의 상처… 그 테두리를 벗겨 보지도 못한채… 그들의 삶을 소설화해서 글을 쓴적이 있다. 지금의 나는 그시간의 나를 반성한다. 나는 그들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떤 자격으로 소설을 쓰려고 덤볐는가 하고…
사실, 인간의 실체는 이렇다. 끝이 없는 욕심으로 덮인 얼굴, 돈을 쥐고도 또 쥐려는 커다란 탐욕의 손. 심각할 경우, 이는 단순한 욕심의 선을 넘는다. 자신의 이익을 차리는 것은 당연한 일. 그러나 헐벗은 이들의 고통을 알면서도 이를 묵살시키는 것은 정말 비인간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근로기준법이 있다는 사실이 무색하던 그 시절, 전태일은 이러한 인간의 실체를 보았다. 욕심으로 가득 덮인 얼굴을 가진 한 인간이 육체도 정신도 빈곤한 불쌍한 약자를 무자비하게 혹사시키는 모습을… 그때에 그의 심장에 불이 붙은 것이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어기는 그들에게 항변을 시작했다. 그러나 그들이 들은척을 할 리가 있겠는가.
모든 법이, 다 적용되기만 한다면 세상은 정말 밝아질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때로 법을 이긴다. 막대한 권력이나 엄청난 富를 소유했을 경우에는 더더욱… 태일은 어느순간 깨달았다.「억압의 벽 아래에서 인간의 고통에 대한 모든 인간적인 관심을 포기하고 침묵하고 있는 사회의 저 두터운 무관심의 벽을 깨뜨리는 것도, 진정서나 말로 하는 호소로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불타는 육탄(肉彈)의 항의로서 가능하다는 것」을…(본문중에서) 그리하여 그는 자신의 몸을 바치기로 결심한 것이다. 죽어가면서 외친 그의 한마디는 "나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였다. 이 얼마나 가슴에 와닿는 말인가. 그는 착취와 억압과 무관심의 질서를 깨기 위하여 죽어가는 노동자의 참혹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고발하기 위해 자신을 버린 것이다. 육신에 대한 미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온몸에 석유를 뿌렸다. 그리고 친구에게 불을 당겨달라고 부탁하였다. 단순한 자살극일 것 이라고 생각한 그의 친구는 불을 당겼고 그와 동시에 그의 몸은 순식간에 불길로 휩싸였다. 그는 외쳤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불길에 휩싸인 몸으로 거리를 달리며… 그렇게… 그렇게… 이를 외친 것은 그의 입술도 아니고, 그의 성대도 아니다. 그의 끓는 심장이었다. 지켜보던 그들은 알았을까? 그들이 무얼 알겠는가. 무얼…… 타고있는 태일의 몸에 물 한방울조차 떨어뜨려 주지 못한 그들이 무얼 알겠느냐고…
사람들은 그가 죽은 후 그를 일컬어 `아름다운 청년`이라 했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젊은영혼까지 불태워 생을 마감한 그를 그렇게 불렀다. 죽음이, 그것도 서러운 죽음이 평화시장의 노동자를 순식간에 `아름다운 청년`으로 만들어준 것이다. 때로는 죽음이 한 생명을 빛나게 할 수도 있음을 전태일이 증명하여 주었다. 소수의 희생이 다수를 살릴수 있음도…
책을 읽으면서 나는 시시때때로 전율했다. 그의 분노가 온몸으로 흡수되었고 그가 남긴 한마디 한마디가 뼈저리도록, 몸서리 쳐지도록 와닿았다. 조영래님의 문체... 평전답게 그의 삶에 대한 해석이 정확했다. 또한 글 속에서 전태일을 향한 사랑의 마음이 느껴졌는데, 이는 영웅 전태일로서가 아니라 인간 전태일로서 진실된 마음으로 진지하게 살아가려 했던 한 청년에 대한 깊은 사랑이었다. 그러한 조영래님의 사랑이 나를 시시때때로 전율하게 한 것이다.
조영래가 없었다면 전태일의 신화 또한 없었으리라. 전태일의 혁명정신 보다는 그의 인간적인 삶을 사랑했던 조영래. 태일을 사랑했던 그 마음이 끝없이 그를 탐구하게 하고 사색하게 하여 그로하여금 펜의 힘을 빌리게 하였다. 세상에서 가장 큰 힘을 가진 펜의 힘으로 그는 만인에게 태일의 진정한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수족관 물속에 집어넣은 곧은 막대기가 수족관 유리를 통과하여 볼 때에는 꺾여서 보이듯, 타인의 눈을 통하여 보는 한 인물이나 어떠한 사건들은 편파적이고 어떤면에서는 비판적이기 마련이지만 조영래의 펜으로 쓰여진 전태일 평전은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태일을 향한 조영래님의 사랑이 한글자 한글자에 심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연… 나는… 정말 언젠가는 변화할 수 있을까. 전태일과 같은 삶을 살 수 있을까? 전태일처럼은 아니더라도 조금이나마 인간답게… 책을 읽고 난 후에도 나는 확신하지 못한다. 아마도… 세상이 뒤집히기 전에는 그렇지 못할지도 모른다. 21살의 젊음이, 분신자살을 하였을 때에도 세상은 잠시 놀랐을 뿐 결국, 조금씩 잊어가고 있지 않는가. 몇 달이 지나고 몇 년이 지난후에는 나 또한 (세상이 그렇듯이) 전태일의 기억을 잊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나의 삶, 그리고 나의 생활속으로 (어쩔 수 없이) 끌려들어가겠지. 내 삶을 살기에도 촉박한 시간이니까. 그러나 이것만은 기억해야겠다. 이것만은 잊지 말아야겠다. 이 넓은 세상속에서 그래도 이러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음은 정말 다행이라는 것… 이것을 내 가슴에 새겨야 하리라.
볼펜도 내려놓고 끄적임이 가득한 스프링 노트도 덮어둔다. 그리고
자, 이제 나는 이 글을 마치기에 앞서 한가지의 과제를 남긴다.
그 과제를 앞에두고 잠시 생각에 빠져본다. 전태일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를 살게 한 것은 무엇인가하고
인간을 살게 하는 원동력은 바로 사랑이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바로서는 그렇다. 사랑이 없으면 전태일의 빛나는 죽음도 없고 어떠한 역사도 없다. 모든 역사는 사랑에 근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이 증명해주듯… 전태일이 백만 근로자들을 대표하여 죽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무한대적 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전태일평전을 저서한 조영래님에게도 그러한 사랑이 있었다. 그 사랑은 이 책에 담겨있으며 우리는 그 사랑을 책을 통하여 느낄수 있다.
전태일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노동자 한사람 한사람의 가슴속에 살아남아, 그들이 절망치 않도록, 무너지지 않도록 그들의 정신의 끈을 붙들어 매고 있을 것이다. 인간을 살게 하는 그 사랑은 전태일을 죽이지 않고 살려둔 것이다. 우리가 죽지않고 영원히 사는법… 그 비밀은 바로 이 사랑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