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를 읽고 삼대 3 3

‘삼대’를 읽고
염상섭의 <삼대>를 이틀만에 다 읽었다. 힘들다. 500쪽이 훌쩍 넘어가니 그럴 만도 하다.
줄거리는 간단하려면 한없이 간단하게 쓸 수 있다.‘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삼대-할아버지, 아버지, 손자-의 이야기’ 즉, 책 표지에 나와 있는 그대로이다. 그러나 세상사 그렇듯이 이 소설도 물론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첫째 느낀 것은, 일제시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떠나서 돈이란 게 얼마나 사람 우습게 만드나 하는 것이었다. 조 의관이 병으로 골골할 때의 수원댁의 행동이라든지 조상훈의 몰락(?) 같은 것에서 잘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작가의 주된 의도는 이런 교훈이 아닐 테니 주제를 흐리지 않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삼대’는 구성 자체가 참 놀라운 소설이었다. 일제 시대의 복잡한 시대상과 세대간의 갈등, 새로운 사상과 의식-이런 것들을 한 가족의 삼 대에 모두 우겨넣는 작가의 솜씨…(생략)

된다.
집안 재산 탕진에 뭣보다도 조의관이 목숨 지키듯 꼬박꼬박 지키는 조상 제사를 지내지 않는 덕에 아버지 조의관과도 만나기만 하면 다툼이다. 상당히 이중적인 이 인물은 결말에서 별로 아름답지 않은 끝을 보여주지만 결코 동정이 가지는 않는다.
죽음으로 인해 소설 중반 이후의 갖은 분쟁들의 원인을 제공했다고도 할 수 있는 조 의관-이 또한 꽤나 재미있는 인물이다. 조선시대식 정통 유교 사상을 고집하는 이 가장은 그러나 돈을 주고 벼슬을 산다든지 명문가의 족보에 불법승차하려고 상당한 액수의 입막이돈을 써놓고는 속으로 끙끙 앓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평생의 임무와 자식을 교육시킨 목표까지도 단지 ‘사당과 (금고)열쇠’를 물려주기 위함일 뿐이라는 데서 이 인물의 전형적 성격을 능히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러한 극과 극의 성격을 지닌 할아버지와 아버지, 게다가 사상가인 친구 등에 둘러싸여 갈피를 잡지 못하는 인물이 바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조덕기이다. 조덕기는 일본에서 교육을 받은 탓에 상당히 앞선 생각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너무나 현실 순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만석꾼 할아버지의 밑에서 아무 걱정 없이 일본 유학을 하던 조덕기가 갑자기 집안 안팎의 풍파에 휩쓸리게 되는 것의 시초이자 복선은 술집에서의 홍경애와의 만남이다. 학교 동창이었으나 또한 아버지의 첩이었던 홍경애가 술집 여자로 일하는 것을 보고는 당황하는 조덕기. 그러나 당시에야 자신에게 닥쳐올 숱한 일들을 예감이나 했을까? 조상 제사를 지내고 조덕기는 다시 일본의 학교로 돌아가고, 그 사이 조 의관은 낙상으로 인해 자리에 드러눕게 된다. 조의관의 건강은 점점 악화되어 가고, 졸업시험을 앞두고 급히 다시 불려온 조덕기는 할아버지로부터 열쇠로 대표되는 실제 가부장의 권한을 물려받게 된다. 물론 만석꾼 죽는 데 협잡이 없을 리 없다. 조의관의 후처 수원댁과 최참봉은 애초부터 조의관의 재산을 노리고 그 밑에 들어왔던 것이며, 덕기에게 보내는 돌아오라는 전보를 일부러 누락시키는가 하면 결국 조 의관이 앓는 틈을 타 비소 독살까지 감행하지만 결국 조의관이 덕기에게 모든 재산과 권한을 물려 주는 바람에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조의관이 앓는 동안 수원댁이 심약해진 그에게 갖가지 아첨이며 애교를 피는 것은 정말 보기 민망할 정도이다.
조 의관이 돌아가고 금고 열쇠를 온전히 조덕기가 차지한 뒤에도 말썽은 계속된다. 특히 조상훈의 문제가 그렇다. 어떤 면으로 봐도 유산의 상속자가 되어야 할 사람은 조상훈인데 한 세대를 건너서 조덕기에게 모든 것이 돌아간 것은 기본적으로 조의관에게 미움받을 짓만 골라 한 조상훈의 잘못이기는 하나 그로서는 억울하다. 게다가 쓰던 씀씀이가 어디 가기는커녕 첩 밑에 뭐 밑에 하며 더 늘어만 가니 마지막 선택으로 금고째 들고 튀다가 요샛말로 딱 걸려서 경찰서 신세를 지지만 결국은 약간의 부정한 방법을 써서 풀려나게 된다.
여기서 잠깐 이 집안의 일을 떠나 조덕기의 친구 김병화에게로 눈을 돌려보자. 그는 이 소설에서 흔치 않은, 곧 죽어도 굽히지 않는 자신의 가치관을 지닌 인물이다. 실제 그는 고집을 굽히기보다는 아버지의 집을 떠나 가난 속에 살아간다. 첫인상과는 달리 그는 상당한 위험인물이다. 사회주의자로서 ‘동지’들과 비밀스럽게 만나고 경찰의 추적을 당하기도 한다. 경찰의 눈을 피해 외국에서 활동하던 ‘피혁’이란 사내의 등장으로 이 ‘주의자’들의 행동은 급속도로 부각되게 된다. 피혁은 홍경애의 집에 잠시 머물면서 김병화에게 국내의 일을 부탁하고 떠난다. 그러나 이 인물이 다녀간 것을 계기로 경찰?사법계에는 사회주의자 검거 비상이 걸리고 이런 상황을 피하기 위해 김병화는 홍경애와 필순이 가족과 함께 반찬집을 여는데 이러한 상황을 오해한 또 다른 운동가 김훈은 그들을 테러하고, 결국은 병화와 김훈은 물론 덕기와 필순 가족, 홍경애까지 조금이라도 관련있는 사람은 모두 경찰서에 잡혀 가 고문까지 받게 된다. 감옥에서 김훈이 음독자살을 해서 결정적인 단서가 없어지자 다들 풀려나지만 김병화만은 감옥에 남게 된다. 이러한 복잡한 일련의 사건들 중에 조덕기는 순수한 필순의 모습에 사랑을 느끼게도 된다.
‘삼대’를 읽고 나면 당시의 시대상이 깊이 이해된다. 극도로 혼란했던 일제시대 당시 사회만큼이나 혼란스럽고 다양했던 인간상의 여러 가지 모습이 눈앞에 펼쳐진다. 소설이야 물론 허구이지만 그 속에 사회의 현실을 숨김없이 반영한 탓일 거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인물들이 나오건만 누구를 따라 살아야 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다시 말해 ‘모범인물’ 또는 ‘절대선’이 없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것은 꼼짝없이 우리 앞에 숙제로 남겨진 것이다. 물론 지금의 사회는 소설 속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처세술이야 어느 시대나 변함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지금의 나야 아직은 그런 것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그럼 이 책을 읽고 나에게 확실히 남은 것은 무엇인가? 글쎄..다 읽고 며칠동안이나 친구들한테 옛날 말투를 쓰게 되는 터에 고생을 좀 한 것이 그것일까?
어쨌든 오랜만에 확실하게 긴 소설을 한 권 읽었더니 가슴 속이 뿌듯해진다. 역시 책은 보는 그대로 남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