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탄길을 읽고 연탄길

어느 샌가 사라져 가는 우리의 ‘연탄길’......
일년마다 대여섯 번씩, 외할머니 댁을 들르게 된다. 그 정겨운 외삼촌의 문 여는 소리 뒤로 언제나 제일 먼저 나를 맞이했던 것은 구공탄이었다. 볼 때마다 내 키의 두 곱을 훌쩍 넘어 언제나 고개가 아프도록 쳐다봐야 했던 연탄. 그 당당한 위엄마저 별 보잘 것 없다고 느끼고, 그 검은 자욱이 묻지 않게 멀리 돌아서 가며 구공탄들을 깔보듯 생각하던 때가 어느 샌가 지나 버리고, 이젠 외할머니 댁의 보일러를 보며 따스했던 연탄의 그 불길을 그리워할 나이가 되었다.
어렸을 때 구공탄을 끔찍이(비싸지도 않고 더럽다는 이유로) 싫어했지만, 왠지 눈 밭 위에 뿌려놓은 연탄재를 밟는 느낌은 좋았다. 아직 덩어리로 남은 부분을 ‘뽀작’ 소리가 나게 밟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고, 그 사알짝 고이 붉게 물든 새색시의 볼처럼 옅은 분홍색이 눈 위에 박혀있는 것도 내 어린 눈을 붙들기엔 충분…(생략)

서 잊혀졌던 행복과 희망, 사랑에 대한 아련한 추억속의 바로 그 느낌 아닐까? 오랜만에 새로이 ‘행복’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연탄길은 말 그대로 우리들의 이웃, 그 중에서도 우리 보다 조금 불편히 살아가는 사람들의 행복 이야기이다. 불편하다고 해서 우리와는 전혀 다르다고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얘기이지만(자신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그 불편함마저 행복으로 느끼고 살아가는 그들에게서 받는 깨우침은 색다른 것이었다.
자식이 교도소에 가는 것을 원치 않아 (일부러) 자신이 교도소에 간 모습을 보여주는 아버지, 딸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4년 동안 보조기구를 다리에 차고 걷던 아버지, 자식들에게 짐이 되지 않게 정을 떼고 죽으려 매일 치매 행세를 하는, 하지만 매일 가족 걱정에 근심하는 할머니... 서로 가난한 처지에 있으면서 먼저 이해해주려 하는 친구들... 그리고 가족들... 모두 다른 이야기들 속의 사람들이지만, 모두에게서 풋풋한 사람 내음이 나고, 다른 사람들의 눈물을 자아내는 것은 모두 같았다. 그리고 이야기 끝 마다 나오는 한 마디의 말들마저도 나의 눈물방울의 흐름만 더 자극할 뿐, 더 이상의 멈춤도, 그 이상의 이성도 없었다. 오랜만에 베개가 젖도록 한껏 울었다. 감동적인 이야기라면 울었었을까...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서 중요한 것을 알아내었다는, 하지만 그것이 아주 생소하게 느껴질 정도로 멀어져 있어서 가까이 갈 수 없는, 그런 곳에 있다는 생각이 들은 것은 무엇 때문이었을까...
“행복은 가까운 곳에 있을 수도 있다.”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내 머릿속엔 어느새 이런 인간다움과 멀어져 가고 있었다. 이런 내가 ‘인간다움’에 감동하고, 눈물을 흘리지만 그 실제로는 점점 그 동경과 이상에서 멀어져 가는 나를 깨닫는 데에는 별로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이 책을 읽고 내 머릿속은 감동의 물결이 아닌, 인간다움을 잊어가는 것 같은 나에 대한 후회와 질책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감동적인 내용에 우선 흘리는 눈물 뒤로, 뒤로는 자신에 대해 돌아봄으로써 흘리는 눈물이 가득 차 있을 것이다. 누가 과연 쉽사리 자신을 포기하려 하겠는가... 이런 내 생각이 잘못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직 이 세상은 행복이라는 이름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런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 환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수많은 이들이 남아있기에...
사람이 살아감에 있어 행복, 희망, 사랑을 느낀다는 것, 그것처럼 이유가 되는 삶의 가치는 없다. 별빛 이슬이 총총히 박힌 백만 평의 녹초 부지를 어떻게 돌려 먹어 배부르게 살까 고심을 하는 사람에게도, 곰팡이 핀 단칸방을 어떻게 하면 온 식구가 편히 살 수 있을까 고심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삶 속에서 고난과 역경이라는 막중한 짐이 일단 지워진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 두 경우에서도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 또한 다르고,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 또한 다르다. 얼굴에 기름기가 철철 넘치며 일부러 헬스장에서 살을 빼는 사람과, 돈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살이 빠지는 사람 사이에서 과연 누가 행복하다고 할 수 있을까? 눈앞에 보이는 실질적인 이익만이 행복의 척도가 될 수 있을까?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옛날 순진한 코흘리개 아이들은 그저 자신과 함께 있어줄 친구들만 많으면 그보다 행복한 일이 없었을 것이다. 멀리서 보기만 해도 한 여름, 찌든 더위에 지친 만물에게 시원한 생명을 주는 강물에서, 뙤약스럽게 내리쬐는 볕을 한껏 담은 은빛 물방울을 튀기며 놀던 아이들에게... 모깃불 앞에서 고슬고슬 잘 고슬은 콩깍지를 벗기며 서로의 얼굴에 장난스런 검댕을 묻히던 아이들에게... 자연만큼 소중하고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는 것들이 또 있을까?
강산이 너댓 번도 더 바뀌고 그 아이들이 이젠 고만고만한 나이의 애들을 기를 때가 된 지금, 과연 이런 시원한 냇물이나 모깃불의 그 구수한 탄내, 그 속에서 노릇노릇 익어가는 콩깍지가 그 아이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 주변에서는 수없이 많도록 어린 아이들이 대중 매체로 유명세를 탄 캐릭터의 인형을 사기 위해, 혹은 게임을 하기 위해 돈에 집착하는 모습마저 볼 경우가 많다. 비단 이 뿐만이랴, 더 심한 경우에는 돈을 위해 부모의 숨을 빼앗고, 가족 간의 불신으로 결국에는 다른 사람의 손에 전 재산이 들어가는 경우까지 있다. 편안한 삶, 가족들의 행복을 위해 끊임없이 돈을 필요로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던가... 하지만 이 것에 대한 집착이 지나침으로 인해 생기는 폐해가 다름 아닌, 지금 우리들이 피부로 직접 느끼고 있는 그런 종류의 일들이라는 것, 그리고 그 일이 이제 우리 삶에 있어서 ‘그냥 받아들여 넘길 수 있는 상황’이 되어 가는 것이다.
돈으로는 모든 것을 살 수 없다. 또한 모든 것을 가질 수도 없다. 500원 짜리 동전 하나면 넣으면, 귀에 익은 곡조를 흘리며 그에 맞춰 앞뒤로 춤을 취대는 조그만 플라스틱 말, 어른들에게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아무리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다 하여도 이런 500원 어치의 플라스틱 말도 타지 못한다. 쉽게 생각해 보면 돈으로 생긴 행복은 한낱 부질없음을 뼈저리도록 느끼게 해 준다. 비록 그 돈이 행복을 위한 발판이 될 수는 있어도...
연탄길의 사람들은, 돈보다 중요한 값어치의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부모를 잃고, 힘겹게 살아가는 삼남매... 그들에게 찾아온 생일날은 다른 집에 비해서 기운이 넘치지 못했지만, 서로에게 느끼는 행복은 그에 못지않았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생일잔치마저 제대로 할 수 있었으랴, 삼남매는 어느 한 중국요리 집에서 자장면을 두 그릇만 시켜서 나눠 먹었다. 하지만, 식당아주머니의 하얀 거짓말(자신이 엄마의 친구라 하고, 공짜로 자장면을 줌)로, 아이들은 그 겨울을 그 어느 때보다도, 포근하고 아름답게 보낼 수 있었다. 돈이 먼저라면, 돈이 행복의 척도가 된다면, 과연 세 남매가 집으로 가는 길에 내리기 시작한 첫 눈이 아름답게 보였을까...
한편, 연탄길의 사람들은 자신이 이런 선한 면이 되지는 못하지만, 어둠이 되어 다른 어둠을 더욱 밝게 빛나게 해 주는 경우도 많았다. 아들을 교도소에 보내지 않으려 교도소에 간 아버지는 분명 사회적으로 ‘어둠’에 속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둠이, 그 고생이 아들의 어둠을 밝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그것은 어둠이 아닌 한 줄기의 밝은 빛이었을 것이다. 자식이 사회의 어둠이 되지 않길 바라는 마음, 자식 앞에서 욕은 먹을지언정 자식을 욕 먹이지 않게 하려는 마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마음은 모성애’라고 했던가. 여기 그와 대등한 힘을 가진 한 이름이 있다. 아버지의 사랑, ‘부성애’라는 그 이름이...
흔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는 뭐든지 해주고 싶다고들 한다.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라다가 알게 된 연인도 서로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고, 먼저 이해해 주려 하는데 하물며 자신의 뱃속에서 나온 아이에겐 오죽하겠는가? 부모님에 대해 말할 때 ‘모성애’, 혹은 ‘부성애’ 이런 단어들로 부모님들의 사랑을 모두 표현할 수는 없고, 그 깊음을 널리 전하기도 어렵다. 다만, 자신이 진정으로 마음으로 느끼고 감사해 하며, 부모님의 사랑에 보답해 드릴 때, 비로소 부모님의 사랑이 더욱 빛나고 은은히 마음을 적셔오는 것이다. 그 은은함이 우리의 메마른 감정을 적시고 메마른 눈물을 채워주는, 이 세상에서 말로 다 표현하지 못하는 그런 것 중 하나라는 것, 그리고 그것이 이 책에 단편적으로나마 나와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그것을 보며 눈물을 보인 것,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 어느 평범한 날의 일로는 기억하기 아까운 추억들이 되었다.
오늘, 저번에 봉사활동을 갔다 온 친구에게서 머리가 울릴 만한 소리를 들었다. 친구가 간 곳(고아원)의 아이들이 당하는 대접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매일 같이 구박에, 폭행에, 심지어는 자신의 형제에게 까지 불신이 생겨, 점점 자기 속으로 울타리를 쳐 들어가며 점점 정신적으로, 신체적으로 병들어가는 어린이들... 과장된 것이었을 수도 있지만, 꼭 없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충분히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을 따지는 것 보다 더욱 문제는 고아원의 아이들이었다. 연탄길의 사람들은, 힘들 때 서로 어깨를 기대주고, 훈훈한 웃음을 주는 사람들이 있어 살아가는 데에 행복을 느끼고, 사랑을 느낀다. 하지만, 의지할 부모 하나 없이, 형제가 있어도 서로 믿지 못하고 매일 구박만 받는 아이들은 어떠한가? 그들이 과연 자신이 행복하다고 느낄까? 그 아이들은, 고아원의 문 쪽으로 나가는 방향으로 데려다 주면 좋아하다가, 다시 들어오면 울음을 터뜨린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아이들을 감시하고, 조그만 잘못에도 인격적으로 무시하는 발언과 폭력이 날아들고....... 꼭 이래야만 하는가? 과연 우리 현실은 책에서처럼, 희망적이고, 따뜻할 수가 없는 건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다른 것이 무엇인가? 모두 부모가 없고, 희망도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두 상황에서의 인간상은 너무나, 아주 너무나도 차이가 난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아파도, 힘들어도 의지할 사람이 없다. 그래서 언제나 아픈 표시도 못하고, 참고, 참고, 또 참는다. 왜 그래야 하는가? 그들도 연탄길의 사람들처럼 의지할 사람, 힘들 땐 기댈 수 있는 사람을 가질 수 없는 것일까? 분명, 이 단체는 이 세상의 여러 고아원 중 극히 일부분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극소수의 아이들이라도, 고통을 받고 있는 그 처량한 모습을 그냥 지나쳐야 할 것인가?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책에서 나온 대로, 나를 희생하여 남을 빛나게 하던가, 같은 아픔을 겪기 위해 멀쩡한 몸임에도 불구하고 보조기구를 착용하고, 과연 내가 이런 것을 할 수 있을까? 이런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말로만 이렇게 불쌍한 아이들을 걱정해 주고 있는 과연 나는 누구인가?
생각해 보면, 나도 내가 힘들 때, 의지할 사람이 있는지, 행복을 제대로 느껴 본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부모님의 안부 전화도 건성으로 받아넘기기 일쑤인 내가 과연 힘들 때 편히 부모님에게 기댈 수 있을까? 내게 진정으로 위로하고, 같이 진정으로 근심을 나눌 친구조차 있는 것일까?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조금만, 조금만 더 커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은데... 나도 아직은 철부지 어린애에 지나지 않나 보다.
아마 우리 세상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더 많은 행복이 있을 수도 있다. 아직 나도 그 행복을 어디서 찾아야 할지 막막하지만, ‘연탄길’의 사람얘기에서 행복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알았다. 사랑, 그것만한 행복이 없으며 또한, 그런 사랑도 언제든지 우리 주위를 부드러이 감싸주고 있다. 다만, 너무 앞만 내다보고 사는 우리들에게 그런 사랑이란 우리 등 바로 뒤에 있을 뿐이다.
오늘도 잠시 기지개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는 것이 어떨까... 친구들, 부모님의 전화, 동생의 장난 등 생각해 보면 모두가 사랑이고, 싱그러운 풀 내음, 한 여름이 다가옴을 알리는 매미 소리 등이 모두 행복임을 알 수 있을 텐데...
연탄길 속의 사람들도 모두 인간이고, 우리들도 인간이다.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아리스토텔레스
이 말대로, 사회적인 동물인 인간이 되기 위해 아니,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돌아가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동물인 ‘인간’이 되고 싶기에, 외할머니의 연탄길을 다시 걸어가고 싶기에, 행복을 찾기 위해 잠시 기지개를 켜 보며, 오늘 하루일과에 마침표를 찍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