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

탁류
고등학교 예비소집일.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을 뒤로하고... 선생님께서 나누어주시는 유인물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을 받자마자 충격감에 휩싸이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숙제` 때문이었다. `내가 이 책을 다 읽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점을 나에게 던지면서 내린 결론은 서점행이었다. 한 권, 한 권 책을 고르던 나에게 `탁류`라는 두 글자가 들어왔다. 탁하기 그지없는 물의 흐름. 왠지 제목에서부터 이유없는 매력이 느껴졌다. 어딘지 모를 공통점에 끌려 읽은 `탁류`는 지금의 나에게 많은 의문점을 제기하며 그에 대한 답까지 스스럼없이 내릴 수 있게 한 그런 책이었다.
한때 군서기를 지낸 바 있는 정주사는 도태되어 군산으로 이주한 후, 은행원?미두 중개상?미두꾼?하바꾼 등으로 전락의 전락을 거듭한다. 그런 그에게는 아내 유씨, 첫째 딸 초봉이, 둘째 딸 계봉이, 큰아들 형주와 막내 병주가 있었다. 정주사가 미두(쌀을 두고 …(생략)

혼하여 생활하던 초봉은, 꼽추인 악한 장형보의 흉계로 남편 고태수마저 잃고, 장형보에게 겁탈을 당하기에 이른다. 이에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초봉이는 다시 박제호 밑에서 일을 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하기로 한다.

무작정 상경하던 길에 우연하게도 서울행 열차에서 박제호를 만난다. 그에 꾐에 빠져 -아니면 진정 쉴 곳이 필요했는지- 그의 첩이 되고, 누구의 자식인지 분명치 않은 딸 송희를 낳게된다. 그러던 어느 날 장형보가 나타나 자신의 딸이라고 주장하며 박제호에게서 초봉이와 아이를 빼앗아간다.

그렇게 장형보의 꾐에 빠져 그에게 옥죄인 채 살던 초봉은 그동안 그가 저질러온 온갖 악행의 실상을 알고 난 후에 그를 살해한다. 공부를 하기 위해 서울로 상경한 동생 계봉이와 한때는 초봉이 흠모했던 남자이지만 이제는 동생의 연인이 된 남승재가 초봉이를 구하려 하나, 결국 초봉은 경찰서에 자수한다.

`탁류`에서의 초봉은 희생양의 상징이다. 파행적인 자본주의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온갖 독소들에 의해 순결한 처녀성을 여지없이 파괴당하는 것이다. 타락한 아버지에 의해 초봉이는 원치 않는 결혼생활을 하게 되고 그것으로 인해 모든 것이 비극으로 향한다. 고태수와의 불행한 결혼생활, 악한의 전형인 꼽추 장형보에 의한 남편의 죽음과 겁탈, 의인으로 여겼던 약국 주인 박제호와의 불행한 첩살이와 아이 출산, 장형보의 새로운 출현과 친부권 주장, 장형보와의 비극적인 결혼생활, 장형보 살인으로 이어지는 초봉의 전락과정은, 이 책의 제목과 같은 금강 물이 하류로 갈수록 탁해지는 정도와 비례하는 것이다.

소설의 거의 마지막에서 장형보를 살해하는 것을 비롯한 모든 초봉의 행위는 모든 것에 대해 체념에 가까운 태도로 이루어진다. 타락한 자본주의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최초의 의지적인 행위가 바로 장형보 살인이라는 행위로 이어진 것이다.

다른 인물에 비해 남승재와 계봉이는 비중은 크지 않지만 진보적인 가치관을 지향하고 있는, `탁류`에서 `청류`로 전환시키고자 하는 그런 희망의 표상으로 나타난다. `탁류의 욕망체계`에 감염되어 있던 30년대 중반 식민지의 도시상황 속에서 나름대로 바람직한 현실대응 자세를 보여주기 위해 설정된 인물들처럼 보인다. 모순적인 자본주의 체계 안에서 일어나는 동물적 욕망의 악순환에서 벗어나 정신적이고 도덕적인 상호인정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욕망체계. 나는 이것이 작가가 제시하고 있는 진정한 `청류`가 아닌가 싶다.

지금의 현실과 많은 공통점을 지니면서 미래에 대한 신념을 제시한 `탁류`. 어쩌면 지금의 현실과 딱 맞아떨어지는 상황에 더욱 공감대가 형성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초봉이가 현실에 맞서 대응하는 의지의 인물이었다면 이야기의 흐름은 어찌되었을까? 진정 혼탁하고 지저분한 물 속에는 깨끗한 물 속에서 사는 물고기는 살지 못하는 것일까? 여주인공 초봉이의 기구한 운명의 족적을, 금강의 물이 상류에서 하류로 흘러내려오면서 점점 탁해지는 현상에 비유하면서, 비극적으로 타락해가는 당대의 삶의 모습을 여실하게 드러내주고 있는 `탁류`. 어쩌면 이 시대가 극복해야할 근본적인 문제점에 대해 가장 현실적이고 근접한 답을 제시하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