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류를 읽고 탁류… 3

탁류
저자 : 채만식
출판사 : 어문각
수업 시간에 이 작품을 배우면서 유난히도 끌리는 건 무엇 때문이었는지 모르겠다. 내용이 쉽게 머리 속에 들어 와서 였을까? 아님 일제 치하라는 배경 때문이었을까? 한번쯤은 진지하게 읽어보고 싶은 작품이었다. 큰 맘 먹고 작품을 보았는데 그 양에서 오는 아찔감이란... 장편 소설임을 감안하더라도, 지금까지 내가 읽어왔던 소설과는 너무나도 달랐다. 책 읽는 것을 좋아하지 않아, 항상 숙제가 닥치면 그 때서야 단편소설 몇 장을 읽고 독후감이라는 것을 써 왔었는데... 막막해서 다른 작품을 할 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그래도 한번쯤은 읽어 보고 싶은 책.
책 한 줄 한 줄을 읽어 나가는 건 너무 지루하고, 힘들었다. 이 작품의 배경이라 여겨지는 금강의 묘사가 너무 길었기 때문이다. 빨리 내가 아는 주인공 초봉이 등장하기를 기다리며,책장을 넘겼다. 하지만 이 금강의 묘사가 싫…(생략)

화라는 감정이었다. 군산에 미두라는 투기 노름이 성행하던 때, 군 고원을 지낸 초봉의 아버지 정 주사는 미두장에서 일종의 노름을 돈 없이 하다가 자기보다 젊은이에게 얻어맞을 뻔한다. 초봉의 아버지는 이곳에서 내기를 하다가 서민층으로 떨어지고, 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자신의 딸 초봉이를 사기꾼이자, 혼색가인 은행원 고태수와 결혼하도록 강요한다. 누추하게 그려지는 정 주사의 모습에 처음에 나는 약간의 연민을 가졌으나, 그의 인간 아닌 인간성에, 혀를 내둘렀다. 다름 아닌 자신의 딸을 물건 넘기듯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주어버리는 그의 행위는 어떤 말로도 변명할 수 없다고 본다.
제중당이라는 약국에서 점원으로 일하던 초봉에게는 장래성이 있는 애인인 의학도 남승재가 있었다. 그러나 초봉은 `효`라는 그 맹목적인 희생정신 아래 고태수에게 시집을 간다. 그러나 헛된 거짓말로 위장했던 고태수는 결혼 후 오래 지나지 않아 일찍 죽어버리고 초봉은 고태수의 친구 노릇을 한 장형보에게 겁탈을 당한다. 여인의 일생에 있어서 그 시대에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순결이라는 것을 잃은 초봉은 약국 주인이던 박제호의 유혹으로 결국엔 그의 첩이 된다.
정 주사와 유씨 부인의 딸로 한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여린 여성. 초봉을 이르는 말이다. 이런 그녀가 이토록 계속되는 불행 속에 살아가야 한다는 현실은 책을 읽어 가는 나를 너무 답답하게 했다. 자신이 원하지 않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싫다는 의지 하나 표시하지 못하는 그녀의 행동이 난 답답하기만 했다. 초봉은 사랑하지도 않는 박제호와 살면서 아버지를 모르는 아이를 낳아 `송희`라고 이름지어 정성을 다해 보살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제호는 초봉을 점점 싫어하게 되고, 집에 장형보가 찾아와서 그 아이가 자기의 아이라고 하며 박제호에게서 초봉을 데려간다. 한 여자의 삶이 기껏 남자들의 노리개에 불과하단 말일까. 사람이 사람 다루는 일을 그렇게 물건 다루듯 하는 장면에서, 난 같은 여인으로서 뭔지 모를 억울함을 느꼈다. 비록 지금과 시대가 달랐다 할 지라도, 그 시대가 아무리 혼탁했다 할 지라도, 어떻게 사람으로서 사람을 물건 다루듯 한다는 것인지... 내 감정이 극에 달하는 이 시점, 다행히도 초봉은 내 맘을 알았나 보다. 여기에서 그동안 쌓여온 초봉의 울분과 한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청순하다 못해, 소극적이다 못해, 바보같은 태도로 그토록 내 맘을 태웠던 초봉은 자신의 불행이 꼽추 장형보 때문임을 안다. 이 때 밀려오는 내 감정의 후련함이란... 지금까지 보아왔던 초봉에게서 나왔다고 여겨지는 행동이라고는 도저히 믿기 어려운 일이 벌어진다. 그토록 여리기만 했던 초봉이 장형보를 단 한 번도 아닌, 여러차례 칼로 찔러 그를 살해한다. 그 여린 몸에서 나왔다고는 믿기 어려운 행동들. 하지만, 난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가 그토록 잔인해 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그 동안 쌓여왔던 울분이 얼마나 컸는지를, 그녀의 감정이 얼마나 억눌려져 있었는지를, 그 동안 쌓인 한이 그녀를 얼마나 아프게 했는지를, 나는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었다.
과연 무엇이 초봉에게 그런 용기를 주었을까? 용기라고 하기엔 그녀의 행동이 믿기지 않는다. 이건 단지 용기로만 이루어진 일이 아닌 것이다. 그 동안 초봉에게 쌓이고 쌓였던 울분, 한, 억울함, 아픔이 너무나도 여린 그녀에게 살인이란 형태로 표출된 것이다. 그 울분과 한이 얼마나 컸으면, 그 여린 여인이 선택한 최선의 방법이 살인이었을까? 결국엔 자신의 손마저 더럽히고 마는 초봉을 보며, 내가 그토록 후련해 했던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초봉이 장형보를 죽였을 땐 그토록 후련하기만 했는데, 지금 그녀에게 남은 건 사람을 죽였다는, 살인이라는 결코 가볍지 않은 죄이다.
탁류 ... 맑고 깨끗하던 물도 군산까지 이르면 깨어진 꿈이고 무엇이고 할 것 없이 휩쓸려 탁류로 변한다... 이제서야 이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토록 여리고 순수하던 초봉이 결국엔 겁탈로 인해 몸이 얼룩지고, 살인자라는 비극적인 인물로 전락하는 모습을 보며, 난 이 작품의 제목을 다시 한 번 새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