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천하 태평천하 4

태평천하
그 동안 채만식의 소설을 접해보지 못했던 나는 오래 전부터 채만식의 소설을 한번 읽어보고 싶었다. 채만식의 소설은 풍자와 해학이 넘치는 소설이라고들 한다. 어떤 느낌일까 궁금하기도 하고, 책제목인 태평천하도 특이하고 해서 이 책을 읽어보게 되었는데 내가 이제껏 읽어보지 못한 문체와 재미있고 특색 있는 등장인물들이 첫 장부터 끝장까지 책 읽는 시간을 즐겁게 해주었다.
처음 윤직원 영감은 인력거꾼과 인력거 삯을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며 등장한다. 인력거꾼은 50전을 요구하는데 영감님은 너무 비싸니 못 주겠다고 하는 것이다. 결국 윤직원 영감의 승리로 끝이 났지만 영감은 그 25전 마저 아까워한다.
윤직원 영감님은 이처럼 돈이라고는 사족을 못쓰는 구두쇠이다. 만석꾼이라고 불리는 엄청난 부자이지만 돈 쓰는 걸 무척이나 싫어해서 무임승차는 물론 명창대회의 상석도 슬쩍하는 자린고비다. 또한 아무에…(생략)

들인 창식의 아들 둘(그러니까 윤직원의 손자들)이 모두 양반 집에 장가를 갔으니 윤직원 영감님은 집안 문벌을 닦는 일에 굉장한 신경을 썼던 셈이다. 게다가 손자 둘은 경찰서장과 군수를 만들어놓을 목표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아들 창식이는 노름과 계집질로 시간을 보내고 장손인 종수는 군수는커녕 시험은 보는 족족 떨어지고 시골에다 첩 살림을 차리고 흥청망청 살아가고 있다. 둘째 손자인 종학은 동경으로 유학을 가있는 유능한 청년이지만 그의 아내인 조씨와 이혼을 시켜달라고 성화라서 윤직원 영감의 속을 썩인다. 그러니 그 둘의 아내인 박씨와 조씨는 생과부인 셈이다. 또한 며느리 고씨와도 사이가 나쁜 윤직원 영감님은 언제나 고씨와 안방을 놓고는 티격태격 이다. 이 집사람들은 전혀 화목한 구석이라고는 찾아볼래야 찾아 볼 수도 없다.

작가는 재물은 남부러울 것 없이 있으나 도덕성이 퇴색된 이 집안 사람들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듯하다. 그는 브로커인 올챙이와 돈놀이를 하여 재물을 모으나 자신의 땅을 부쳐먹고 사는 사람들의 생각은 눈곱만치도 안 하는 듯 싶다. 자기 나름대로의 합당한 이유를 들어가며 가뭄이 들어 벌이가 없는 농민들을 밀어붙인다. 그러는 가 하면, 15살 된 어린 첩을 들여 꼬셔보려고 나이에 맞지 않는 볼 상 사나운 짓을 하기도 한다.

그러니 이런 영감님에게 진정하고 충성스런 사람은 없는 것이 당연하다. 브로커 올챙이도 겉으로는 영감님을 위하는 척 하지만, 속으로는 한 몫 할 생각만 하고, 며느리 고씨도 영감님과 철천지 원수사이다. 영감님이 그토록 믿는 대복이지만 재물을 모을 생각에 빠져 영감님의 딸 서울아씨를 노리고 있을 뿐이다. 손자며느리들도 뒤에 가서는 영감님을 놓고 속닥거린다. 그럴 만도 하게 만석꾼의 집안답지 않게 며느리들의 옷은 겨울인데도 다 떨어져 기워 입은 무명옷이다. 게다가 증손자 놈인 경손이마저도 영감님을 속으로 무시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영감님의 어린 첩인 춘심이와 몰래 만나는 게 바로 경손이니, 가히 콩가루 집안이라 할 만하다. 하지만 주위의 이런 사람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영감님은 혼자서만 좋으면 그만이다. 나이도 지긋한 분이 더 오래 살겠다고 아침마다 소변으로 눈을 씻는 가 하면 한약을 매일 같이 들고, 어린아이의 소변마저 마시는 진풍경을 벌인다.

이 글에서 작가는 이런 윤직원 영감이나 그의 일가를 나쁘다고 혹은 잘못했다고 지적하기는커녕 오히려 추켜세우는 쪽에 가깝다. 그러나 그 내면을 잘 들여다보면, 사실은 그 인물들을 조롱하고 경멸하고 있는 듯하다. 마치 잘 못했는데 잘 했다고 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극중 인물들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작가의 문체는 마치 내가 판소리 고전 소설이나 탈춤을 보는 듯한 느낌을 들게 만든다. 옛날 서민들이 탈춤으로써 양반들의 그릇된 행실을 꼬집었듯이, 작가도 그렇게 함으로써 비판의 대상들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는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영감님은 어느 날 청천 벽력같은 전보를 받는다. 그렇게 아끼고 촉망받던 둘째 손자 종학이가 사회주의 운동을 하다가 경시청에 끌려갔다는 것이다. 영감님은 이렇게 좋은 태평 천하에 웬 사회주의냐며 분노를 터뜨린다. 조선을 보호해 주는 고마운 일본순사도 있고 예전처럼 화적떼도 없어졌으며 공명한 정사로 세상이 이렇게 좋아졌는데 어째서 사회주의를 하냐는 것이다.
마지막 구절에서는 작가의 풍자가 극치를 이룬다. 이 책에서는 직접 적은 아니지만 영감님의 이런 모순된 생각을 보여줌으로써 우리에게 윤직원 영감의 도덕적 타락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그리고 과연 태평천하가 무엇을 뜻하고 진정한 태평천하란 무엇인지 스스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타락 속에서 과연 무엇이 생성되어야 하고 무엇이 소멸되어야 하는지 한번 곰곰이 생각 해 볼 기회를 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