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나서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고나서
대학 신입생 때 선배들로부터 추천받았던 도서 제1호가 바로 ‘역사란 무엇인가’였다. 전공이 역사학이다 보니 가장 그럴 듯한 책이기도 했지만, 정작 나는 그 때 그 책을 읽지 않았다. 유명세를 워낙 싫어하는 괴팍한 성격이다 보니, 누구나 다 칭찬하는 책에 이상하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 그리고는 25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 책을 읽어보았다. 마치 대학 신입생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 때 읽었다면 나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지금보다는 훨씬 더 격하게, 감동적으로 열렬히 그 내용을 받아들였을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카아가 말하고 있는 내용은 현재에 와서는 아주 당연한 것으로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카아의 정의는 지금도 내가 학생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칠 때 마다 하는 매번 말하는 그 것이다. 역사란 두 가지의 측면을 가지는 데 하나…(생략)

이라고 보는 콜링우드의 역사 주관주의이다. 이 두입장은 각기 나름대로 역사학의 발전에 큰 영향을 끼치고 공헌을 했지만, 다들 역사학의 일면만을 강조하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카아는 이 두 입장을 변증법적으로 종합하여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게 된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다.
카아의 너무나도 유명한 이 명제는 지금은 역사학의 정의를 규정하는 시금석이 되었다. 나도 이 명제에 물론 동의한다. 그러나 역사란 우선적으로 객관적인 학문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역사가의 관점이 아니라 일단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이 사실들을 어떻게 우리에게 보여주는가 하는 것은 역사가의 몫이다. 이것은 마치 달RIF과 닭의 관계와 같아서 어느 것이 우선적이고 기초인가를 규정하는 것은 얼핏 보아서는 말장난 같아 보이기도 하고 둘 다 필요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관계규정은 결정적인 순간에는 엄청 큰 차이를 낳기도 한다.
이와 비슷한 문제로 물질이 우선이냐 정신이 우선이야 하는 문제가 있다. 물질도 정신도 다 있어야 하는 데 어느 것이 우선인가에 따라 엄청나게 많은 것이 달라진다. 나는 정신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물질이 우선적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이렇게 되면 종교는 설 자리가 없어진다. 잠시 이야기가 밖으로 샜다. 그래서 나는 역사를 가르칠 때 사관을 가르치는 것 보다는 우선 역사적 사실을 정확히 탐구하는 진지한 자세와 태도를 가르치는 것이 옳다고 본다. 역사는 비록 둘의 종합이라 할지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