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들의 천국을 읽고나서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나서
중학교 3학년 때,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년 전 이야기다. 친구가 다니는 교회 수련회를 따라서 소록도를 간 적이 있었다. 전세 버스를 타고 전남 고흥의 소록도 선착장까지 이동, 배를 타고 섬으로 들어가는 긴 여정이었다. 소록도 입구에서 봉고차와 트럭으로 몇 분 간 이동하자 우리들이 묵을 숙소에 도착했다. 숙소라기보다는 성당이라 해야지 맞을 것이다. 목사님과 우리들은 성당 예배당에 짐을 풀고 섬을 둘러볼 겸 밖으로 향했다. 나무들이 그토록 울창하게 가지를 뻗은 길은 난생 처음인 듯싶었다. 어디를 가나 길 옆으로는 신록의 나무들이 여름 햇살을 맞으며 그늘을 형성하고 있었다. 말 그대로 섬 전체가 온통 초록으로 물든, 그런 형국이었다. 큰길가로 나가자 섬 중앙에 위치한 한센병원이 보였다. 병원에 가까이오자 소록도에 온 사람들이 우리 말고 더 많이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문둥병 환자들의 …(생략)

팔트 도로를 따라 가던 길을 갔다.
밤이 되자 우리들은 교회 예배당 마당에서 삼겹살을 구워먹었다. 그리고는 나로선 처음 경험하는 저녁 예배라는 것을 드렸다. 예배당 안으로 들어가, 소록도에 거주하며 목사 일을 하고 있는 건강인 목사의 연설을 들었다. 자세히는 기억나지 않지만, 일제의 무자비한 고문과 탄압 속에서, 소록도의 많은 환자들은 주님의 힘으로 버텨냈고, 지금의 아름다운 섬을 이룩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전국의 많은 교회에서 소록도의 교회로 성경캠프를 다녀간다는, 대충 이런 연설이었다. 목사의 연설이 끝나고 우리들은 다 같이 찬송가를 불렀는데, 언제 왔는지 이 근방에 사는 환자 몇몇이 구석에 앉아 찬송가를 부르는 모습이 보였다. 작은 체구에 얼굴이 심하게 일그러져서 성별 구분도 잘 되지 않았던 환자도 섞여있었다.(파마머리를 한 것으로 보아 여성으로 짐작된다.) 저녁예배가 끝나고 우리들은 취침 준비를 했다. 나도 졸린 눈으로 내 잠자리를 마련하려던 참에, 그 여자 환자가 나에게 뚜벅뚜벅 걸어와서는 비닐봉지에서 무언가를 꺼내 건넸다. 나는 놀라 허둥지둥 일어나서는 그것을 받았다. 그 환자의 얼굴과 마찬가지로, 손가락의 흔적도 없이 둥글게 일그러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찐 감자였다. 하얀 속살에서 김이 무럭무럭 피어나는 씨알 좋은 찐 감자였다. 그녀는 찐 감자를 주고는 집으로 가는 듯, 예배당을 나갔고 나는 어리둥절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다음날 배를 타고 육지로 돌아갈 때까지 몇 가지 일이 더 일어났지만, 그것은 하나같이 16살 소년에겐 좀처럼 형용할 수 없었던, 그런 이상한 기억으로 다가왔다. 2년 전, 16살의 소년이 느꼈던 그 이상한 감정의 근본들을 이 작품은 어렴풋이 재현하고 있다.
소설은 전체 3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은 새 원장으로 부임한 조백헌이 소록도를 둘러보고 점차 섬을 ‘천국’으로 만들려는 모색과 전개의 단계이다. 원장의 견제자로서의 상욱의 등장과 서미연, 윤해원, 황장로 등의 중심인물들이 등장하는 시기도 바로 1장이다. 2장은 원장의 간척사업과 그에 따른 반복되는 실패와 좌절, 그리고 이 소설의 중심 메시지인 지배층과 피지배층 간의 결코 동행되어질 수 없는 운명을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사실, 소설의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한 사건은 크게 한가지다. 바로 ‘오마도 간척사업’이 그것이다. 어떻게 보면, 소설 전체에 모든 사건들은 이 ‘오마도 간척사업’에 귀속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오는 배반의 징조들, 살인, 탈출극, 시위, 육지 사람들과의 마찰 이 모든 것이 ‘오마도 간척사업’ 이라는 커다란 사건 속의 부속품이란 것이다. 3장은 앞에서 말했듯이, 소설의 전체 메시지를 확고하게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사건이란 것도 2장에 비교해보면 뚜렷하게 미미해진다. 신문기자 이정태의 방문과, 윤해원과 서미연의 결혼이 3장 사건의 전부이다.
박정희정권 시절, 신동아에 연재된 이 소설은 연재 자체만으로도, 이청준이 도전과 고뇌를 치렀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소설 내용은 과정이 어찌됐든, 지배층과 피지배층과의 화해를 윤해원과 서미연, 나병환자와 일반인 간의 혼인으로 상징함으로써 일단락 짓는다. 바깥사람들이야 어찌됐든, 뭍으로 나가면 학대당하는 문둥이들이, 그들의 자의가 아닌 또 다른 건강인에 의한 타의로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섬에서 그들만의 천국을 만들었다. 괴롭힘 없는 분명한 천국이다. 문둥이들만의 천국 소록도, 결코 박정희 군사정권, 아니 그 뒤로 이어지는 전두환, 노태우 정권하의 대한민국이 작품 속 소록도와 크게 다를 수는 없었다.
독재자들은 국민들에게 낙토를 주겠노라 약속했다. 이것은 자신들의 이익이 아니라 국민에게로 돌아가는 일이라고 하면서 단결시켰다. 하지만, 그들과 국민은 결코 같을 수 없었다. 결코 돌짐을 나르고 땅을 파는 국민이 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것이다. 동행하지 못할 운명은 같은 길로 나아가지 못한다. 누구의 동상도 세워질 수 없는 곳,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