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판을 읽고나서

심판을 읽고나서
「심판」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소설 작품 중 하나다. 주인공 요제프K는 정말 실존하는 인물처럼 실재적으로 다가왔다. 그가 휘말린 소송도 마찬가지다. 비록 선고를 내리는 재판관들은 요제프K가 볼 수 없는, 어둡고 높은 곳에 있지만 그것은 어쨌든 요제프K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소송과 그것에 대처하는 주인공을 통해 작가는 인간과 삶의 본질적인 면을 작품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삶=죽음의 도제 수업이라는 명제는 여기서 나왔다. 주인공이 휘말린 소송도, 죽음의 도제 수업의 일부에 불과하다.
누군가 요제프K를 중상한 것이 틀림없다. 아무 잘못한 일도 없는데 어느 날 아침 그는 체포되었기 때문이다.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문장이다. 이 두 문장은 소설 전체의 이야기를 창조하는 역할을 한다. 부연설명하지 않고, 핵심을 파고드는 문장이다. 독자는 이 두 문장만을 읽고서 앞으로 사건이 어떻게 …(생략)

한마디로 K는 이상한 세계와 홀로 싸워야 했다.
개인이 집단을 이길 수는 없다. 개인의 능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하더라도 어딘가에 ‘소속’되어있는 집단을 이기기에는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본래 개인과 집단이라는 말이 생길 때부터 개인은 집단을 이길 수 없는 어휘였다. 「심판」은 이러한 사실을 깨닫는 과정이다. K혼자서 누가 명령을 내리고, 그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오는지도 모르는 이 이상한 세계와 싸워서 이길 수는 없었다. K의 패배가 기정사실화 된 상황에서 카프카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러한 세계의 전형을 보여주는 것이 관료주의고, 카프카는 관료주의 속 인간의 모습을 보여주려 했다. 어떤 체제 안에 속해 있는 사람들이 존재할 수 있으려면, 권력이 올바르게 배분되어야 한다. 수직으로 말이다. 수평적 권력관계에서의 체제는 돌아갈 수 없다. 인간의 본성이 그렇다. 아무리 수평이라 해도, 아무리 권력이 균등하게 나누어졌다고 해도 위와 아래는 있다. 명령을 하는 사람과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은 정해져 있으며, 개인이 이런 체제를 타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저 묵묵히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을 수행하며 살고 있다. 거기서 행복감을 느끼며, 자신이 올바른 자리에 있다고 안심한다. 카프카는 이런 체제와 인간을 보여주려고 「심판」을 썼다.
재판에 나름대로 열심히 임한 K는 어느 날, 집행자들에게 이끌려 개처럼 목에 칼을 꽂혀 죽는다. 이로써 K의 삶은 끝났다. 그는 어느 날 체포당했으며, 그 소송을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계속 노력하다가 어느 날 개처럼 끌려나와 죽었다. 그것은 아주 조용한 일이었으며, 세계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K가 죽은 후에도 튼튼하게 돌아갈 것이다. 옮긴이의 말처럼 K의 삶이 천국으로 가는 과정이었다면, 그것은 행복했다기보다는 차라리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죽음으로서 모든 고통에서 해방되고, 천국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면 삶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열심히 살아가지 않아도 언젠간 죽게 되고, 죽으면 천국으로 가는 문이 열린다. 희망은 존재하는 것일까.
희망은 존재한다. 그것은 우리 삶에 실재하고 있다. 물론 순간적이고 단편적인 감각이나 기억들로 말이다. 우리의 삶에서 희망이 영원할 수는 없다. 삶이 인간의 생명을 유지시키고, 살아가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다면, 죽음이 희망이 될 수는 없다. 적어도 인간은, 사는 동안에는 계속 살기를 희망할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 다음에는 희망이 올 수 없고, 삶이 지속되는 동안 희망은 존재한다. ‘죽음의 도제 수업’의 과정 하나하나가 인간에겐 희망인 것이다. 인간은 어차피 죽을 운명이지만, 살아있을 동안에 그러한 사실을 주시하고, 계속 주목하는 인간은 별로 없다. 살아있을 동안에의 인간은, 그 ‘살아있음’에 집중한다. 사는 동안의 많은 행동들. 그것들은 죽음으로써 끝나는 것이지만 그것들로 인해 인간은 잠시나마 행복을 얻고 희망을 얻는다. 인간의 희망은 이런 의미에서 계속 바뀌고, 영원히 지속될 수 없는 것이다.
요제프K의 희망은 어떤 것이었는가. 소송은 그에게 한계이자 희망이었다. 소송을 진행하는 동안 그에게 희망이 있었다고 감히 생각할 수 있다. 자신에게 유리하게 소송이 진행되고 있을 때, 변호사를 처음 만나고 자신의 소송이 쉽게 풀릴 수 있다는 느낌을 받았을 때 그는 희망을 얻었다. 또한 희망이 없었다면 소송을 계속 진행시킨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희망은 인간 행동의 근원이다. 소송을 안전하게 끝낼 수 있다는 희망. 하지만 그런 희망들은 일시적인 것이어서, 그가 죽음으로서 사라진다. ‘죽음의 도제 수업’ 그 과정 하나하나가 희망이 되는 인간의 삶. 어쩌면 희망은 죽음이 존재함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성질의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 죽음을 배워나가는 과정이라면, 죽음이 없다면 삶이 없고, 삶이 없다면 희망이 없는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