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쓰기 - 한스 기벤라트에게 한스기벤라트

영원한 휴식과 함께 수레바퀴를 벗어난 나의 동무, 한스 기벤라트에게
홀로 남으실 아버지 사시절 의복을 마련하느라 하루하루를 격하게 보내고 있는 중, 네 마지막 서문을 받았다. 너는 이미 이승의 사람이 아니어 내 글을 접하지 못하겠다만, 하루아침에 막역지우(莫逆之友)를 잃은 내 서러운 마음이 혹 전해질까 몇 자 적는다.
지난 여름, 수도원에 처음 들어가 꿈에 부풀었던 네 모습이 생각나는 구나. 오래된 지붕과 고딕식의 첨탑 속에서 열심히 공부하겠다고 굳게 다짐했던 네 마음이 어찌 빛깔을 잃은 달빛처럼 허무함으로 변했는지, 혹 동무인 나의 불찰은 없었는지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내 평범한 여염집의 여식이 아니라 학문을 접할 기회가 없어 무지몽매(無知蒙昧)하다마는, 이 세상을 떠나던 너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정해진 규칙과 일정한 사회의 관습적 생각만으로 너와 같이 천재성을 지닌 학생들의 재…(생략)

내 어찌 망설일 수 있겠느냐?
부모의 뜻이 아닌 자신의 만족과 꿈을 위해 목숨을 버린 너의 결단이 어쩌면 시대에 부응하는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치열해져 가는 생존 경쟁 속에서 자칫하면 인간의 도리에 벗어나기 쉬운 이 신 사회일수록, 나를 있게 해주신 부모를 효로써 모시는 것이 으뜸 행실이 아닐까 하는 나의 소견이다.
그렇지만 내 두렵지 아니할 리 있겠느냐. 선인을 따라갈 일을 생각하면, 한때를 못보고 이팔청춘 죽을 일이 못내 억울하기도 하고, 눈총과 괄시를 받으시며 홀로 살아가실 아버지의 후사가 걱정도 되어 식음을 전폐한지 오래이다. 허나 내 어찌 남은 시간을 눈물로만 지샐 수 있겠는가. 아버지 춘하추동 의복이며 망건이며 마련할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아, 이제 며칠 남지 않았구나. 한시 바삐 아버지의 버선볼을 모두 꿰매야겠다.
내 황천길에 오르면 돌아가신 우리 모친과 너를 모두 상봉할 수 있을 터이니 저승이라 할지라도 한오라기 희망은 있구나. 곧 만날 날을 기약하며 이만 쓰련다.
분주히 행선 날을 준비하매 영원한 동무 심청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