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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사지도를 읽고
암사지도는 어두운 시대의 조형도이다. 전쟁이 끝난 후 황폐해진 서울 거리, 그 메마른 들판, 길이 보이지 않는 사막에 던져진 젊은이들의 황폐한 삶의 단면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는 세 젊은이가 등장한다. 주인공 형남은 제대하고 갈 곳이 없어 전우인 상덕을 찾는다. 상덕은 그나마 제법 그럴 듯한 집을 가지고 있다. 이 집에는 현주라는 여자가 상덕과 동거한다. 처음에는 상덕에게 기생하기 시작한 미술학도 형남은 상덕이 직장을 잃고 가진 돈마저 다 없어지자 극장의 간판을 그리며 번 돈으로 세 사람의 생활비를 댄다.
현주는 상덕과 처음 만난 날 먹여주면 따라가겠다면서 상덕과 동거를 시작한 처지. 상덕은 형남의 돈으로 생활을 하기 시작하면서, 형남에게 현주를 넘겨주려 한다. 처음에는 두 사람이 다 거부하지만, 결국 돈의 논리에 함몰하면서 세 사람은 요일을 정하여 따로 성관계를 갖는 묘한 삼각구도를 만들며 산다.
상덕과 형남은 스스로의 가치 의식을 포기해간다. 변질되어 가는 그들의 내면은 생존 조건의 열악함에서 비롯된 것일 터이다. 그런 점에서 작가는 생존의 모멸감을 능가할 어떤 가치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지도 모른다.
실제로 형남은 이중적 태도에서 갈등한다. 한편으로는 부도덕한 삼각 관계에 대하여 비판적 의지를 갖지만, 그 내면에는 현주를 가짐으로써 상덕에 대한 우월감을 가짐과 동시에 먹거리의 위대함에 대한 조소를 자학적으로 즐기려고 한다. 상덕 또한 어떤 인간적 가치도 존립하지 못하는 사회적 현실에 자조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여성은 곧 창녀라는 그의 의식 이면에는 그의 말과는 달리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희구가 어려 있을 것이다.
스스로 돈의 노예가 되겠다고, 사회 현실이 그렇게 요구한다고 받아들이는 현주는 언뜻 보기에는 아주 현실적인 여자인 듯하다. 나무토막처럼 형남을 받아들이는 그 성적 행위에는 창녀의 논리가 깔려 있다.
그러나 그녀는 임신과 동시에 스스로 자신의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되찾는다. 아기는 바로 어느 누구의 것이 아…(생략)
닌 나의 것임을 선언하는 것. 그리고 이제 안락한 방법을 버리고 거친 사막으로 나아간다. 바로 자신의 것인 아이를 잉태한 채. 이러한 현주의 선택은 비로소 자신을 되찾는 것이며, 자기를 바로 인식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는 전쟁이 상징하듯, 남성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이 부조리하고 어두운 세계에 대한 떳떳한 비판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이처럼 전후의 어두운 시대를 냉소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우리가 매우 건실하다고 믿었던 인간의 합리성과 이성적 판단은, 생존의 당위성 앞에서 한낱 종이조각처럼 허약하다. 여성의 가치는 성적 상품으로 타락하고 우정, 의리, 도덕, 윤리 등등의 관념은 연탄보다 쉽게 부서진다. 이제 인간의 조건은 어떠해야 하는가를 예리하고 묻는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최소한의 인간다움을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가치를 지니는 작품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작품에서 몇 가지 문제점을 포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작품의 설정은 어느 정도의 개연성과 보편성을 갖는 것일까, 인물에 대한 설명은 충분한 것인가, 특히 그들의 정신적 방황의 그 근원에는 무엇이 놓여 있는지에 대한 설명이 충분한가? 사회적 현실의 맥락이 이 작품에서는 제대로 기능하고 있는가, 그들의 황폐함에 깔린 정신적 기저에 대한 작가의 이해는 어느 정도의 수준인가 등에 대하여도 묻지 않을 수 없다. 자칫하면 이런 경향의 작품들이 허무주의에 닻을 내림으로써, 모처럼의 인간 조건에 대한 회의가 항복선언으로 그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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